유튜버 ‘저격’에 출렁이는 독일 정치…연정 휘청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3 15:00
  • 호수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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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련 대표 ‘온라인 여론 규제’ 발언에 표현의 자유 탄압 논란 뜨거워

“여러 DJ들과 함께 지난 몇 주간 기독민주연합(기민련)이 이런저런 테마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봤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에! 정말 문제가 심각해요”.

독일 유튜버 리조(Rezo)의 영상 ‘기민련의 파괴’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55분짜리 영상에서 리조는 기민련이 집권 기간 독일의 빈부격차를 키웠고,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한 파리조약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과 시리아 전쟁에 국제법을 위반해 가며 독일군의 인력과 자원을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기민련은 이 영상을 애써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심각하게 다룰 이유도 사실 없었다. 리조는 주로 위트 있는 가사를 앞세운 자작곡을 불러 인기를 얻은 유튜브 가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디오는 5월18일 공개된 후 유럽의회 선거 마지막 날인 26일 밤까지 불과 8일 만에 1000만 회 이상 조회됐다. 설상가상으로 선거 이틀 전인 24일에는 90명 이상의 독일 인기 유튜버가 ‘기민련·기독사회연합(기사연)·사회민주당(사민당)·독일대안당(AfD)을 뽑지 말라’고 호소하는 2분50초짜리 영상이 리조의 채널에 추가로 공개됐다. 기민련은 선거 직전인 25일에야 부랴부랴 리조에게 대화를 제안했지만, 이미 젊은 유권자들의 여론은 “기민련은 가망이 없다”는 쪽으로 기운 후였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민련과 자매당인 기사연은 18~29세 독일 유권자들로부터 고작 13%의 득표율을 올렸다. 같은 연령집단에서 녹색당은 33% 득표율을 기록해 제1당이 됐다. 녹색당은 독일의 주요 정당 중 리조가 ‘저격’하지 않은 유일한 정당이다. 선거 다음 날인 5월27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안네그렛 크람프-카렌바워 기민련 당 대표는 리조의 영상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점을 패인으로 꼽았다.

5월18일 독일 유명 유튜버 리조가 ‘왜 기민련과 사민당을 뽑으면 안 되나’를 주제로 영상을 올렸다. 영상은 8일 만에 1000만 조회 수를 기록했고 실제 선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 유튜브 캡처
5월18일 독일 유명 유튜버 리조가 ‘왜 기민련과 사민당을 뽑으면 안 되나’를 주제로 영상을 올렸다. 영상은 8일 만에 1000만 조회 수를 기록했고 실제 선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 유튜브 캡처

크람프-카렌바워, “여론조작” 발언으로 뭇매

하지만 본격적인 ‘기민련의 파괴’는 유럽의회 선거 직후 시작됐다. 크람프-카렌바워 대표가 기자회견 자리에서 작정한 듯 리조 영상에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선거 이틀 전 독일 신문사 70곳이 함께 기민련과 사민당을 뽑지 말자고 했다면, 이건 명백히 선거 전 여론조작에 해당됐을 것이다. 여론조작에 대해 어떤 규제가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에 적용되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곧바로 “기민련 당 대표가 인터넷 여론을 규제하려 한다”는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크람프-카렌바워 대표가 바로 당일 트위터를 통해 “내가 표현의 자유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니, 말도 안 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지상선이다. 다만 선거전의 규칙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며 해명에 나섰지만 비판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슈테판 쿠즈마니 슈피겔 온라인 베를린 국장은 5월27일 논평을 통해 “이 나라에서 가장 막강한 직위를 가진 야심 있는 여성이 자신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씁쓸하다”며 크람프-카렌바워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튿날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브뤼셀에서 EU 정상회동 뒤 기자회견에서 “내가 아는 우리 당의 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며 구명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람프-카렌바워에게 “인터넷 여론 규제 계획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 참여자가 8만 명을 넘기는 등 비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크람프-카렌바워는 이미 여러 차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그녀는 독일에서 지난 2017년 10월 동성혼이 합법화된 후에도 “동성혼을 허용하면 근친 간 혹은 2인 이상의 결혼도 허용하게 될지 모른다”고 발언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지난 3월에는 쾰른의 카니발 축제 행사에 참석해 “요즘 베를린에는 제3의 성을 위한 화장실이 따로 있는데, 소변을 앉아서 볼지 서서 볼지 모르는 남자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독일에선 남녀로 이분된 성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화장실이 확산되는 추세다.

유럽의회 선거 다음 날인 5월27일(현지 시각) 기자회견에서 크람프-카렌바워 기민련 대표가 선거 패인으로 “리조의 영상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을 꼽았다. ⓒ 연합뉴스
유럽의회 선거 다음 날인 5월27일(현지 시각) 기자회견에서 크람프-카렌바워 기민련 대표가 선거 패인으로 “리조의 영상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을 꼽았다. ⓒ 연합뉴스

사민당과의 연정 깨질 수도…독일 정치 격랑

한편 안드레아 날레스 사민당 대표는 유럽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와 연방의회 원내교섭단체장 등 모든 직위에서 사퇴했다. 그녀가 중심이 돼 기민련과의 연합정부를 구성한 결과, 사민당의 지지율이 폭락했다는 책임론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기민련-기사연과 사민당은 지난 2017년 총선 당시 각각 32.9%, 20.5%의 지지율을 기록한 뒤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연정을 꾸렸다. 이 결정은 당시 사민당 내에서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사민당은 이미 메르켈 집권 기간 두 차례에 걸쳐 총 10년간 연정에 참여하면서 핵심 정책을 빼앗겼으며, 중도좌파당으로서의 색깔이 옅어졌다는 지적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3월 치러진 당원 투표 결과 66%가 연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사민당은 각 지방선거, 그리고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꾸준한 지지율 하락을 기록하는 중이다.

당원 투표로 결정된 일이지만, 사민당 내부에서는 날레스 전 대표에게 책임을 물으며 거친 말들이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토마스 오퍼만 전 연방의회 사민당 원내교섭단체 대표는 공영방송 1채널의 뉴스에 출연해 “당내에서 제기된 많은 비판들이 수준 이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같은 당원을 대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날레스 전 대표의 사퇴로 연정 자체가 깨지고 조기 총선이 실시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슈피겔 온라인은 기민련 지도부가 날레스의 퇴임을 당 내외 여론 전환의 계기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6월1일과 2일 치러진 지도부 회의에서 기민련은 유럽의회 선거 참패와 관련해 인사를 하는 대신 “침착하게 대처하고 같은 편을 저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크람프-카렌바워는 날레스 사퇴 직후 사민당 측에 후임을 속히 결정해 연합정부가 깨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일 사민당이 연정을 끝낸다면 조기 총선이 불가피하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 기민련-기사연은 여전히 28.9% 득표율로 독일 내 1당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유권자들이 최근 잇따른 실언으로 언론의 자유와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낸 크람프-카렌바워를 총리로 선택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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