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용, 경기 나서는 선수들에 “걍, 잘 놀다 나와”
  • 기영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6 08:00
  • 호수 15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화창조의 밑거름 된 정정용 U-20 대표팀 감독의 ‘수평적 리더십’

폴란드에서 벌어진 U-20 FIFA 월드컵에서 남자축구 사상 역대 최고의 성적을 올린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끈 정정용 감독. 그를 그저 덕장, 프로축구 경험이 없는 무명 출신 등으로만 말하기는 좀 모자란 듯하다. 덕장, 무명 출신 모두 맞지만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정정용 감독의 ‘수평적 리더십’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따르게 하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이다. 20세 이하 월드컵 대표팀에서 가장 유명했던 말은 이강인의 별칭인 ‘막내형’이다. 나이는 팀내 막내지만 실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부르는 선수도 많았다고 한다. 만약 팀 분위기가 수직적이고 패쇄적이었다면 막내형이란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형은 형이고, 막내는 막내라는 것이 그동안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스포츠 문화였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2002 한·일월드컵 때 거스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형’을 빼고 이름만 불러라. 경기를 하는 도중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실제로 이강인은 막내형처럼 행동했다. 세네갈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 들어가기 직전, 두 살 많은 이광연 골키퍼의 양 볼을 감싸며 “해낼 수 있어”라고 자신감을 불어넣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수훈선수 인터뷰를 할 때는 “형들이 도와줘서 내가 어시스트할(골을 넣을) 수 있었다. 형들이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다”면서 형들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정 감독은 이번 대회 F조 예선 마지막 경기, 그동안 6번이나 우승을 차지해 20세 이하에서는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앞두고 운동장에 들어가는 선수들에게 “걍(그냥) 잘 놀다 나와”라는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그 ‘잘 놀고 나와’라는 표현 속에 위축되지 말고 평소처럼 하라는 것을, 서로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는 어린애처럼 함께 기뻐했지만, 에콰도르와의 승부차기에서 1, 2번 키커들이 연이어 실축했을 때 미동조차 하지 않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 연합뉴스
ⓒ 연합뉴스

형처럼 친근하지만 과감한 결단력도

정 감독이 국내파 중 최고 선수인 조영욱을 스타팅 멤버에서 빼고, 가장 빠르다고 하는 ‘쌕쌕이’ 엄원상을 후반 조커로만 기용해도 선수들은 전혀 불만이 없다. 정 감독이니까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세 이하 대표팀 ‘미드필더 전력의 절반’이라는 정우영(바이에른 뮌헨)이 소속팀의 반대로 끝내 출전이 좌절되었을 때도 선수들에게 “그래서 우리는 (이)규혁(제주 유나이티드)이를 얻었잖아”라며 잔뜩 가라앉은 선수단 분위기를 살려 놓기도 했다.

정 감독은 결단력도 있다. 에콰도르와의 4강전 때 1대0, 간발의 차이로 앞서던 후반전 28분 이강인을 빼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의심케 했다. 아무리 지쳤다고 하더라도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강인을 빼다니. 다행히 그대로 이긴다면 뒷말이 없었겠지만, 만약 동점을 허용하거나 역전패를 당했다면 정 감독에게 모든 비난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강인은 아무런 불만 없는 표정으로 축구장을 빠져나왔고, 결과는 1대0으로 이겼다. 정 감독은 축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물세례를 선수들로부터 받았다. 평소 그가 팀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