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부부의 모범사례’를 만들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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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아내’ 아닌 ‘단독자’로서의 이희호 선생

이희호를 여사라 부르고 싶지 않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이희호 선생께서 소천하셨다. 선구적 여성운동가, 평화운동가, 민주화투사, 사회운동가.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언론이 오랫동안 다듬었을 선생의 부고 기사는 선생을 이렇게 소개한다. 선생이 살아온 이력과 이룬 업적에 깊이 감사하며, 천수를 누린 그의 생물학적 죽음이 애통하기보단 대선배가 떠나심에 허전하고 마음이 얼얼하다. 간절한 추모의 마음에 더하여 선생이 남기신 다양한 의미, 그중에서도 그 남편의 아내였다는 사실에 대한 소회를 좀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추모글들이 이희호는 이희호, 김대중 이전에도 이희호였다는 사실을 애써 말한다. 기혼여성으로서 드물게 독자적인 업적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여성운동가로서 그이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김대중의 부인이어서 그런 큰 운동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크다. 이 때문에 그가 독자적인 위대성을 지닌 스승이었다는 이야기를 모두 애써 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선생을 이렇게 추모하는 가장 큰 계기가 그분이 고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이 모순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떠나주지 않는다. 그분은 왜 ‘여사’가 되었을까. 나는 ‘여사’라 부르고 싶지 않은데.

우리는 힐러리가 빌과 결혼해 클린턴 부부가 된 것에 대해 가끔 비판을 한다. 힐러리가 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재능을 너무 소진했고, 그 결과 그 자신은 첫 번째 여성대통령이 되지 못했다고 말이다. 이희호가 여성지도자로서,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한 것을 이 일과 견주어 말해도 될까? 물론 나는 이 생각이 우리 시대의 소망적 사고가 투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여 결혼이라는 종속을 거부하자!라는.

2002년 5월8일 당시 영부인이던 이희호 여사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2년 5월8일 당시 영부인이던 이희호 여사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성지도자’의 재발견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은 한 중년 여성운동가가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했다는 사실 앞에 서 본다. 가난, 백수남편, 전처소생 두 아이, 병든 시누이와 시어머니. 그러나 김대중과 이희호는 결단했고, 우리는 두 사람의 마음의 비밀을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결혼이 장차 세상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결단이었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결혼한 뒤 고작 9년 만에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부정선거만 아니었다면 그는 1971년에 이미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희호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감옥 아니면 연금, 현해탄에서 수장될 뻔하거나 사형수가 되는 등의 가능성만이 오히려 분명했을 것이다. 이희호는 개인으로서도 고생스러운 조건의, 당대의 가장 위험한 정치인과 결혼했고,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이희호 개인의 이력이 재발견되며 지도자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원래 그분이 그런 분이었는데도. 이것이 결혼했기 때문일까? 그렇다, 결혼했기 때문이고, 이 점이 나의 명상의 핵심이다.

그이는 남편과 함께 군사독재를 이겨냈으며 동시에 전통적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데도 성공했다. 혼자서는 못할 일이자 바로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못 해냈을 일이었다. 김대중과 결혼함으로써 이희호는 평등한 부부의 모범사례를 만들어냈고 가정이 양성평등의 터전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김대중과 결혼하고 그이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버티어냄으로써 그 모범사례를 보편화할 토대를 마련했다. 힐러리에게도 이희호에게도, 당대의 맥락, 가장 가능성 있는 정치인과의 결혼을 통해서만이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결혼제도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맥락에서 잘 이해되지 않을 정상가족화의 압력이었다. 운동의 최전방은 가정이었다. 가정을 변화시키면 모든 것이 변한다.

당대의 놀라운 ‘여성’지도자들 또한 뜻밖에도 결혼하고 몇 명씩이나 자녀를 낳아 길러내는 일을 해 왔더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까? 그 여성들이 수퍼우먼이어서가 아니다. 소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어냈다고 자부하는 우리 사회의 어떤 시대는, 여성이 자기실현을 하고자 할 때 그를 지지하는 배우자도 존재하던 시절이었다는 깨달음. 이것을 성별분업이 진행되던 어떤 시기의 특수성이라고만 말하고 싶진 않다. 그런 여성지도자들이 많았다는 발견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싶다.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함께 새로운 가부장제가 여성을 점점 더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YWCA 초대 총무 시절의 이희호 여사 ⓒ 김대중평화센터
YWCA 초대 총무 시절의 이희호 여사 ⓒ 김대중평화센터

통치에 지분을 지녔던 영부인

많은 사람들이 이희호 선생님의 독립성, 그 단독자적인 위대함을 새삼 발견하고 놀라워한다. 그런데 나는 그이가 결혼한 여성으로서 그러한 독자성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라 모든 여성이 그럴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한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한 다른 여성은 왜 이희호처럼 할 수 없었는가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질서에 물어야 한다. 이희호 선생만큼 탁월한 여성이 아니더라도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결혼으로 지지받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남편이 김대중처럼 놀라운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더라도, 모든 아내가 이희호처럼 남편을 변화시켜낼 수 없더라도.

우리는 참으로 자연스럽게 영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 부른다. 대통령의 아내가 저절로 첫 번째 여성이 된다. 하지만 이희호라는 영부인은 우리가 익숙하게 바라보던 영부인과는 사못 달랐다. ‘부인’들을 모아 봉사활동을 하거나 소위 ‘내조’의 영역에서 조신함과 어머니다운 온화함을 보여주거나, 심지어 청와대의 야당 노릇이라는 말로 미화되고는 있지만 반대의견을 위험하지 않은 수준에서 전달하는 일 등이 육영수가 만들어놓은 현모양처형 영부인상이다. 이희호 선생은 그에 비해 통치에 지분을 지닌 영부인이었다. 여성장관, 여성부 탄생, 가족법 개정 등등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드러나는 지분이다. 김대중의 정치에 여성성이 깃든 것은 보이지 않는 지분이다. 온전히 여성과 가정에만 부과되었던 다양한 돌봄의 윤리가 사회의 일이 되었다. 결혼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상호주체로서 서로의 지분을 인정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영부인은 단순히 대통령과 결혼한 여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퍼스트레이디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탁월한 개인의 존재감으로서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로서 중요한 자리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고수하는 한, 영부인은 자동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가족이 사회의 기초단위로 여전히 기능하는 동안이라도, 영부인이 아닌 공적인 이름, 공적인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부인이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도 선거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대중과 이희호가 서로를 알아본 일은, 국민인 우리가 김대중을 알아본 일처럼 좋은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희호를 이희호만으로 알아가게 될 것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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