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제발 떠나주세요"…미투에 멍든 캠퍼스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8 08:00
  • 호수 15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투' 논란 잠잠해지자 가해 교수 줄줄이 복귀
대학 '성폭력 대응책' 총체적 난국

학문의 상아탑인 대학이 사제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대학가에서 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가 제기된 지 1년여가 흘렀지만, 시사저널 취재 결과 사태가 봉합된 대학은 찾기 어려웠다. 가해 교수로 지목된 이들이 줄줄이 교단에 복귀한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미투 운동에 동참했던 학생들은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 한 대학에서 직접 ‘미투 대자보’를 적었다는 대학생 A씨는 “(미투가) 터진 직후 학교가 학생의 편에 서줄 거라 믿었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며 “문제가 된 교수들이 사과 한마디 없이 학교에 남았고 대학은 ‘어쩔 수 없다’며 핑계만 대고 있다. 현실은 미투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6월6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캠퍼스에서 ‘권력형 성범죄 가해 A 교수 규탄’ 집회를 한 뒤 학교 밖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6월6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캠퍼스에서 ‘권력형 성범죄 가해 A 교수 규탄’ 집회를 한 뒤 학교 밖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떠나지 않은 스승에 피켓 든 제자들

“A교수는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사직하라.” 6월6일 현충일, 학생 700여 명이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 돈암수정캠퍼스 앞에 모였다. 비가 내리는 공휴일, 학생들이 캠퍼스에 운집한 이유는 자신들을 지도했던 A교수의 파면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A교수는 지난해 대학가 ‘미투 운동’ 당시 가해 교수로 지목됐던 인물이다. 총학생회에 따르면, 현대실용음악학과 소속 A교수는 지난해 4월 학생들과의 일대일 수업에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여자를 만나고 싶다” “너를 보니 전 여자친구가 생각난다” 등 성희롱 발언을 일삼은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 학생들은 지난해 6월 교내 성윤리위원회에 A교수의 성희롱 사실을 신고했다. 이후 성윤리위원회는 지난해 8월 ‘징계’ 의견을 달아 A교수를 징계위원회에 넘겼다. 그러나 징계위원회는 A교수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경고' 조치를 내린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결국 2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비정년 전임교수인 A교수는 올해 다시 임용됐고 학생들은 좌절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졸업생 김아름씨(가명·24)는 “후배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무겁더라. 그래서 (집회에) 참석했던 것”이라며 “학교나 A교수나 누구 하나라도 진심으로 반성했다면 (재임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학생들이 침묵하길 바라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중앙대 역시 같은 양상의 학내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피해 학생의 미투→ 대학 측 사건 접수→ 가해 교수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미투의 악순환’이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B교수 성폭력사건 해결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6월4일 서울 동작구 서울캠퍼스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B교수의 파면을 촉구했다. 기자회견에는 중앙대 학생들을 비롯해 연대단체 회원들까지 50여 명이 참석했다.

비대위에 따르면 B교수는 지난해 11월초 본인이 담당하는 학부 수업을 수강하는 본교 재학생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다. 사건 당시 피해자는 평소 복용하던 수면제와 과음 탓에 심신의 제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는 게 비대위 측 설명이다. 피해 학생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자해하는 등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B교수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자 학교 당국은 B교수를 모든 강의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사건을 접수한 학교 인권센터가 사태를 축소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인권센터가 지난 2월 B교수의 중징계를 징계위원회에 권고하면서, 그 근거로 '성폭력'이 아닌 '교원 품위 손상‘을 적시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비대위 관계자는 “인권센터는 해당 사건이 성폭력임을 명명하지 않은 채 ‘품위 유지의 의무’ 문제로 축소해 중징계를 권고했다”며 “이 밖에도 강단에서 혐오 발언을 일삼은 교수가 견책 처분을 받고, 수년에 걸쳐 학생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교수에 대한 징계위가 아직도 열리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징계위원 구성을 알 수 없고 가해자만 징계 결과를 알 수 있는 구조적 문제도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피해자는 인권센터와 영어영문학과의 무응답에 이어 다시 징계위원회의 무응답을 마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투 받쳐줄 '대학 내 시스템' 정비해야

결국 ‘시스템의 부재’가 캠퍼스 미투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용기를 내 피해사실을 알리려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도와줘야 할 대학 내 기관이 오히려 사태 확산을 막는 데만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이 교수와 대학 모두를 불신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실제 성폭력 피해 학생 중 대다수가 학교 측에 피해를 알리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조현각 미시간주립대 교수가 지난해 3월12일 발표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 경험이 있는 학생 중 92%가 ‘피해 때문에 대학 내 프로그램·기관·사람과 접촉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중 42%가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서울 소재 6개 대학의 남녀 학부·대학원생 1944명 중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는 학생 459명을 상대로 이뤄진 설문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 인권센터가 가해 교수에 대한 중징계를 권고할 수는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며 “결국 징계위가 가해 교수의 징계 수위 등을 정하는데, 징계위의 구성원 면면을 보면 총장이나 높은 직위의 남자 교수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힘없는 인권센터와 이해관계가 맞물린 징계위원들 구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어 이 교수는 “대학에서 미투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피해 학생을 마주하는 사람이 관련 전문가여야 한다. 젠더 감수성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이들, 즉 피해 학생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각 대학마다 상주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과연 이 같은 인력과 시스템을 우리나라 대학들이 갖췄는지 의문이다. 교육부가 실태조사를 통해 대학별 성폭력 대응기관의 운영실태 등을 파악해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