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①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⑯박관용 전 국회의장 ⑰송기인 신부 ⑱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⑲임권택 감독 ⑳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21 이문열 작가
“글쎄, 할 얘기가 특별히 있는 건 아닌데….”
작가의 휴대전화 벨이 연신 울렸다. 전화를 끊으면 곧바로 또 전화가 오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할 얘기가 있는 건 아니다”는 작가의 말이 호탕한 웃음소리에 뒤섞였다. 간간이 한숨을 짓기도 한 작가는 서울에서 온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시사저널이 소설가 이문열 작가와의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을 찾은 건 6월7일 오후 1시30분경이었다. 부악문원은 이문열 작가가 30여 년간 머물며 집필활동과 후진 양성을 해 온 문학사숙이다. 그동안 문인뿐 아니라 사회각계 인사들이 작가를 만나러 이곳을 찾았다.
취재진의 방문 시기가 묘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다음 날 아침 8시 이곳에 들러 이문열 작가와 ‘차담’을 나눌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작가의 휴대전화에 불이 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황 대표와의 만남을 사전 취재하려는 기자와 방송에 섭외하려는 작가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황교안 대표 정치 신병치고 전투력있어 보여”
자연스럽게 근황을 묻는 대신 차담을 첫 질문에 올렸다. 황 대표와의 만남은 어떻게 성사된 걸까. 이문열 작가는 “그전부터 한번 보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마침 황 대표가 이 근처에 일정이 있었다”며 “만찬이나 조찬을 할 수 있느냐 해서 가시는 길에 차나 한잔하자고 한 거다”고 설명했다.
황 대표가 직접 찾아온다고 하니 무슨 얘기를 나눌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황 대표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2~3일 전에 얘기를 들었는데 예정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 갑작스럽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좀 등한한 편인데, 오신다고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지금부터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특별히 생각해 두신 말씀은 없다는 거네요.
“지금부터 생각하는 중인데, 현실적인 부분은 황 대표가 일을 훨씬 더 많이 벌였고, 만나는 사람도 많고, 그래서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뭘 얘기해 주기보다는 들을 게 훨씬 많을 겁니다. 궁금한 부분에 대해 듣고 싶어요, 오히려. 많은 분들이 여길 오시는데 제가 해 줄 얘기가 있고 훈수 둘 게 있어서 오라는 게 아니라 상대방 얘기를 듣는 게 좋아서 오라는 겁니다. 그런 기준을 정하고 만납니다. 제가 지금 정치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런저런 사람들이 수군거리겠죠.”
자유한국당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황 대표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떤 구체적인 요청을 받는다고 해도 아마 다 밝힐 수는 없을 거고, 실제로 제가 할 일도 없을 거예요. 본인들도 판을 짜 가지고 나름대로는 일사불란하게 나오고 있는 중이니까. 다소간에 시행착오는 있을지 모르지만. 황 대표도 정치 신병치고는 순발력 있게 잘하더만. 제법 전투력도 있어 보이고.”
황 대표는 보수진영에서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행보는 어떻다고 보시나요.
“황 대표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계속 성공할지 그건 모르죠. 정치라는 게 그렇잖아요. 아직 판이 끝난 게 아니고 지금 현재는 대표죠. 나중에 (대선후보를) 정할 때 그 말을 탈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가 아직 남아 있고. 바깥 변수가 그리 많은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 이쪽저쪽이 다 날아간 것도 아니고. 예전에도 선거를 2~3년 앞두고 빛났던 사람들이 많았죠. 지금 대선을 얘기하기는 너무 이르죠. 아직 3년이 남았지 않습니까.”
“총선 전후 이합집산 변화 많이 생길 것”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얼결에 그리 됐죠. 호된 맛도 많이 봤고. 그게 빌미가 돼 가지고 지금도 저를 가장 정치적인 작가로 만들어놨죠. 그런데 저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도 알 거예요. 그 뒤로 정치 모퉁이 어디에도 한 번 서 본 적이 없어요.”
공천심사위원 하실 때 보인 모습이 강렬했기 때문 아닐까요. 정치권에도 그랬고 국민에게도 그렇고.
“글쎄, 강렬한 건 아닐 텐데. 저는 그때도 어리둥절했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사건인지 몰랐어요. 공천심사위원이라는 게 정식 직책도 아니고 단기간 참여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위원 15명 중 1명일 뿐이었죠. 그런데 이후에 인터넷을 보면 제가 (작가로 살아오며) 한 게 참 많은데 그런 건 아무것도 없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한 것 그것만 딱 나와요.”
정치에 직접 참여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셨죠.
“예 그렇죠. 그런데 지금도 그 인상이 남아 있고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뭐 어쩌고 그래요. 도대체 제가 뭘 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웃음).”
그 후에도 보수 정치권에서 도움을 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령 작년에는 홍준표 전 대표가 포럼 고문을 맞아 달라 요청한 걸로 압니다.
“가끔씩 그래요. 그런데 그 뒤로 온 건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큰 도움이 되지도 못했을 거예요. 제가 참여할 준비가 돼 있고 도울 준비가 돼 있을 때 오면 다를 건데 갑자기 휩쓸리게 되면 ‘어어’ 하다 지나간다고. 앞으로 정치권이 어떻게 될지,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지만, 지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보고 있는 겁니다.”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일도 마찬가지였나요.
“뭐 물망에 오른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 제가 보기에 심심하면 이용해 보고 찔러보는 거 아닌가 싶어요. 참, 사람 우습게만 만들고. 저의 영향력이나 발언력이 증대될까 겁내는 세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년 총선을 전후로 정치권이 요동칠 수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이문열 작가도 “이래저래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변화가 많이 생길 것”으로 내다봤다. 황교안 대표 체제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자유한국당이 공천을 놓고 내부 갈등이 격화할 수 있다. 공천 관련 경험이 있는 그는 어떻게 예상하고 있을까.
“친박 병합 문제가 튀어나올 거예요, 싸움이 나기 때문에 지금은 약간 나눠져 있는 게 바로 솟아오를 겁니다. 그때쯤 되면 한 지역구에서 중복되는 후보들이 많을 거예요. 그러면 누가 공천권을 가지느냐를 놓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텐데, 황 대표가 정확히 처리해서 넘어가야 할 일이죠.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을 겁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도 다툼이 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그때는 상당히 괜찮았던 것 같아요. 공천심사위원회를 잘 따라주고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줬으니까. 저항할 수 없었던 게 첫 번째로 공천을 배제한 게 최병렬 대표였어요. 최 대표도 각오하고 있어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천심사위원회 결정에 반발한 건 제 기억에 없어요.”
최근 몇 번의 선거에서는 반발이 굉장히 심했는데, 공천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참 어렵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게 개개인에게는 정치적 생명이 걸린 건데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1차적으로 경선을 거쳐야 할 거예요. 공천권을 누가 쥐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이번에는 50% 이상 그래야 한다고 봐요.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적폐만 쌓여왔다면 우리 사회 발전할 수 없어”
그동안 이문열 작가는 보수진영에 대해서도 날 선 비판을 해 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보수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빨리 부활할 수 있다. 그런데 죽으려고 하지 않으니 다시 살아날 수가 없는 거다”라는 그의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 해석하면 좀 폭탄 같은 말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법체계나 탄핵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한 결국 탄핵 사유가 어디에 있느냐를 봐야죠. 보통 가장 많이 말하는 게 박 대통령의 실정인데 그보다 더 큰 게 불통 구조예요. 누구나 동의할 거라고 보는데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사람들이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칼로 자르듯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제일 좋은 건 누가 누구를 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주는 모습을 보이는 거죠. 그게 보수를 살리는 기회가 될 텐데, 그걸 기대할 수 있을는지.”
예전에 ‘보수라는 것은 지나간 사람, 지나간 시간에 대한 존중’이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그런 부분이 갈수록 부족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렇죠. 지금은 더 심하죠. 지나간 것은 다 옳으니 무조건 존중하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어떤 세월을 견뎌서 살아남는다는 건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살기 위해 최소한의 선택을 했을 수 있죠. 순간순간 어렵게 선택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노고를 좀 기억했으면 해요. 그리고 어떤 공로에 대한 인정 같은 것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적폐청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만약 그렇게 최악의 적폐들만 쌓여왔다면 지금과 같이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없었을 거예요. 1945년 광복 후 우리 상황이 어땠나요. 당시 식민지에서 독립해 출발한 동아시아 국가 중 제대로 성장한 건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나쁜 놈과 악당만 있었다면 그런 사회가 어떻게 됐겠어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면 과거를 깔끔히 청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과거를 청산한다는 환상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과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지워지고 청산되는 게 아니거니와 그 환상 자체가 굉장히 독선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악의적일 수 있습니다. 반성을 한다든가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든가, 그건 모르겠지만 몇십 년 전에 이미 소멸시효가 사라진 것까지 소멸시효를 없애가면서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적폐청산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고 보시는 건가요.
“제가 보기에는 심하죠. 저런 식으로 하면 지금 여기 단 한 사람도 성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