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쇼핑한다 ‘새로운 국적’을
  •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04 08:00
  • 호수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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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정치 갈등 피해 ‘국적 쇼핑’하는 시대

보통 국적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 국적을 바꾸는 것은 오랜 시간 다른 나라에 거주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정 비용이나 조건을 충족하면 짧은 시간 내 시민권을 제공하는 국가가 점점 늘고 있다. ‘국적 쇼핑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앤티가바부다’라는 나라가 있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로 전체 면적은 서울의 3분의 2 크기인 약 440㎢, 9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조그만 나라다. 길고 긴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 번쯤 봤을지도 모르는 이 작은 나라에 최근 중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곳에는 훌륭한 리조트가 많이 있지만 중국인들의 방문 목적은 관광이 아닌 쇼핑이다. 그런데 쇼핑 품목이 신기하다. 바로 ‘시민권’이다.

앤티가바부다의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앤티가 국가 개발펀드에 10만 달러를 기부하면 된다. 바로 시민권과 여권을 받을 수 있다. 그냥 기부하는 게 싫다면 150만 달러를 투자해 사업을 하거나, 정부가 승인한 부동산 프로젝트에 40만 달러를 투자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시민권을 신청하기 위한 인터뷰는 없다. 신청서 제출을 위해 방문할 필요도 없다. 단지 신청 후 5년 동안 1년에 5일씩만 체류하면 자격이 유지된다.

이렇게 얻은 시민권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소득에 대한 세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150개국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국민이라면 세계 189개국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어 관심이 적을 수 있지만, 74개국만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중국인들로서는 매우 매력적인 ‘쇼핑’이다. 높은 소득세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이다.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 역시 이 나라 국적을 취득했다.

이 나라는 왜 이런 사업을 시작했을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력산업이던 관광업이 위축되자 2013년 본격적으로 이 사업을 시작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2322명의 투자자들이 앤티가바부다의 시민권을 획득했다. 전체의 69%는 국가 개발펀드에 대한 기부 방식을, 19%는 부동산을 구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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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판매 수익, GDP의 14%인 나라도

시민권을 최초로 팔기 시작한 나라는 어디였을까. 앤티가바부다와 마찬가지로 카리브해에 위치한 ‘세인트키츠네비스’다. 이 나라는 1984년부터 세계 최초로 기부 또는 부동산 매입 등을 전제로 시민권을 판매했다. 오랫동안 유명무실하게 방치되던 이 제도는 2006년 자산관리 및 이민 컨설팅을 하는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진출하자 본격 가동되면서 시민권이라는 무형의 자산으로 수익을 올리는 사업으로 진화했다.

지금도 시민권을 판매 중인 이 나라는 지속가능성장펀드에 15만 달러를 기부하거나 40만 달러의 부동산을 구매하면 시민권을 부여한다. 텔레그램을 만든 러시아의 파벨 두로프도 이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진다. 세인트키츠네비스의 시민권 판매 수익은 2014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14%를 차지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카리브해 지역 이외에 유럽의 여러 나라 역시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대표적 국가로 키프로스와 몰타가 꼽힌다. 키프로스의 경우 200만 유로의 부동산 투자와 더불어 15만 유로를 정부 연구 및 개발펀드와 토지개발기구에 기부하면 시민권이 부여된다. 투자를 6개월 이상 유지해야 하는 조건이 있지만 5년 후 부동산을 매각해 최소 50만 유로만 유지하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고 평가된다. 이런 방식으로 키프로스는 2013년 이후 5조원이 넘는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키프로스와 몰타의 경우 유럽연합(EU)의 정식 회원국이기 때문에 이곳의 시민권을 획득하면 EU 회원국 간 이동은 물론 취업 등이 자유로워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곳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다.

 

많은 ‘투자유치’ 끌어낼 수 있는 ‘시민권’

포르투갈 역시 ‘골든 비자’라는 명칭으로 유사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50만 유로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1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을 영위할 경우 5년간의 영주권 발급 이후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 또 인구가 희박한 낙후 지역의 경우 최소 투자금액을 20% 차감한 40만 유로로도 신청할 수 있다. 포르투갈은 이를 통해 약 5000명의 투자자들로부터 2017년까지 3조 유로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런 시민권 판매는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그리고 영국까지 일부 조건들은 다르지만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부동산 투자이민제도와 공익사업 투자이민제도를 실시 중이다. 두 가지 제도 모두 법무부가 지정한 부동산 투자 상품이나 펀드에 5억원 이상을 투자하면 경제활동이 자유로운 거주자격(F-2)을 취득할 수 있고, 5년이 경과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제도 시행 초기인 2012년을 전후해 반짝 인기를 끌었지만 중국인들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최근 투자도 급감하고 있다.

시민권을 판매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투자유치’다. ‘시민권’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장 많은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는 무형의 가치를 갖고 있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해외로부터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데, 특별한 경쟁력이 없는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시장 붕괴로 어려움을 겪은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부동산 구매와 연계한 시민권 판매에 나서고 있다. 사실 이런 방식은 과거부터 ‘투자 이민’이라는 형태로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시민권 판매 자체로 수익을 올리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시민권 판매는 기본적으로 국내 정치가 불안한 나라의 부자들이나 세금 등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하는 계층들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까지 이런 프로그램의 주요 대상은 주로 러시아와 중국으로 알려진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과의 무역분쟁이 격화되면서 미국 내 체류가 곤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유학생 및 부호들이 적극적으로 시민권 구매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 간 투자유치 경쟁은 지속적으로 격화되고 있고, 시민권까지 투자유치의 대상으로 활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경우 해외로부터의 직접투자가 감소하고 있다. 최근엔 자산가를 중심으로 미국 및 싱가포르 등으로의 이주를 알아보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도 이어진다. 국적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시대.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어딜 가겠어?’라고 너무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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