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섹스는 싫어. 이런 섹스를 원해!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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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여자들의 섹스북》이 주는 선물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다. 임신과 출산에 대해 배웠다. 본고사 시절이니 지금처럼 입시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내용을 두세 달에 걸쳐 배우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교과 과정에는 있었다). 하굣길 버스 안에서 다른 반 친구를 만나면 “너는 몇 개월이니?” “낳을 때 되어가지?” 같은 대화를 다른 학교 학생들 들으라고 짓궂게 하고들 했다. 멀쩡한 여고생들이 버스 안에서 임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일은 거의 ‘외설스러운’ 일에 속했기에, 참기름 짜듯 재미가 났다. 섹스의 과정을 생략해 버린 채 ‘배 속에 아이가 들었어요’부터 배운 것임에도 흡사 이미 ‘알 것 다 안 것’ 같은 착각이 있었던 거다. 여자에게 성은 곧 생식이라는 것을 알면 다 아는 셈이었다.
 
한채윤이 쓴 《여자들의 섹스북》은 내가 고교 때 배운 것과 딱 반대의 자리에서 여자의 몸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성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따라다니는 임신 이야기라든가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예 없다. 본문 첫 문장은 이렇다. “우리가 가장 먼저 떨쳐버려야 할 고정관념은 생식기와 성기를 동일시하는 생각이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렇잖아. “생식기와 성기를 동일시하면 모든 성행위가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만 좁혀”지고, “이런 관점은 섹스를 남성 중심적으로 만든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가 어찌 보면 모든 것이다. 성기는 성을 담당하는 기관, 생식기는 생식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지금까지 세상은, 여성에게는 성기가 없는 것처럼, 또는 여성 생식기가 그 두 기능을 다 담당하기 때문에 여성의 성은 억압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가르쳐왔다. 두 기관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일 뿐 서로 다른 기관이라는 것이 남성에게는 그토록 분명한데 여성에겐 왜 이리 생소할까.
 
과시되는 남성의 성기, 전시되는 여성의 성기
 
생소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 같은 반 여학생들끼리 학교 앞 여관을 빌려 포르노영화를 본 일이 있다. 남성 성기를 제대로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인 우리들은 처음엔 신기하고 부끄러웠으나 점점 기분이 잔뜩 나빠져서 다 보지 못하고 여관방을 나왔다. “포르노 보는 남자는 저질이야”라는 당시 우리의 말은,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본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과시되는 남성의 성기와 전시되는 여성의 성기라는 뚜렷한 대비를 경험이 없다고 몰라보지는 않는다. 폭력당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의 섹스북》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혁명적이다. 여자들의 성이 남성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자유를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그 즐거움을 누리는 각종 방법을 알려준다. 물론 섹스북에서도 가장 큰 성적 쾌락은 성기의 마찰이 아니라 마음 맞는 상대와의 대화다. 말로 하고 몸으로 하는 대화. 남자들이 포르노를 통해 섹스 대신 폭력을 배우는 동안, 여자들은 아무것도 안 배웠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좀 더 나이 어릴 때 이 책을 봐야 한다고 딸들에게 권하고 싶다. 여자를 제대로 사랑하고 싶은 남자에게도 적극 권하고 싶다. 페미니즘의 정치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여성이 자신의 몸과 욕구를 이해하고 말하는 일임을 깨우쳐주는 책이다. 나는 그런 섹스는 싫어. 이런 섹스를 원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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