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재선 시간표에 맞춰진 ‘비핵화 열차’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7.09 14:00
  • 호수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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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딜 대신 스몰딜 카드 맞교환부터…내년 말까지 로드맵 이어질 듯

‘깜짝쇼’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던 6·30 판문점 회동이 큰 성과를 거둔 채 마무리됐다. 이로써 올 2월 하노이 2차 북·미 회담 결렬로 잠시 멈췄던 ‘비핵화 열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이번 만남은 형식부터 남달랐다는 분석이다. 통상 정상 간 만남은 수개월 전 실무회담을 통해 기획·준비되는 반면, 이번 회동은 트럼프 대통령의 즉석 제안에서 비롯됐다.

이번 회동 전까지 미국과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에 따른 냉각기를 이어갔다. 회동 직전인 6월27일 북한은 권정근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의 개인담화를 통해 “조·미(북·미) 대화가 열리자면 미국이 올바른 셈법을 가지고 나와야 하며, 그 시한부는 연말까지”라고 못 박았다. 톤은 고압적으로 비춰졌지만, 메시지는 “다시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방한으로 협상 테이블이 다시 짜였다.

6월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6월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에게 판문점 회동은 확실한 정치 이벤트다. 트럼프 대통령이 G20 회의와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그 사이, 미국에서는 민주당 대선주자 간 첫 TV토론회가 열렸다. 공화당 후보로 차기 대선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국인들의 이목이 민주당 후보들에게 쏠리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번 판문점 회동으로 그 고민은 한 방에 해결됐다.

북핵 해법의 중심에는 한반도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이번 회동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핵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자신들의 시간표대로 이끌고 가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 원장은 “내년 11월 대선일에 맞춰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해법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만들기 위해 북한과 정치적 거래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 역시 이러한 뜻을 분명히 알고 있다. 권정근 국장이 데드라인을 ‘올해 말’로 정한 것에서 이러한 의도가 읽힌다. 한 대북소식통은 “하노이 회담 이후 북측은 트럼프 대통령이 뮬러 특검의 공세에 밀려 ‘영변 핵시설 사찰 및 폐기=경제제재 해제’ 카드를 받을 거라 착각했다”면서 “최근 북한은 제재 해제보다 체제 안정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 같다”고 말했다.

판문점 회동으로 북핵 협상은 다시 싱가포르 1차 북·미 회담 직후로 되돌아간 모습이다. 다시 살펴볼 대목이 1차 회담 합의문이다.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항구적인 평화 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 노력 △전쟁 포로 유해 발굴 등이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네 번째 항목은 미국과 북한 양측 모두 이견이 크지 않다. 워싱턴 소식통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 세 가지와 관련해 북한과 미국은 하노이 회담 전 실무회담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봤다. 관건은 합의문의 세 번째 항목인 비핵화 방식 및 절차다. 이는 양측 실무자들이 결정할 수 없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권력이 세습되고 있는 북한의 권력구조 특성상 실무자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국가 간 협상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보니 논란이 있지만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선 정상 간 톱다운 방식만이 현재로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체제 안정으로 전략을 바꾼 이유로는 제재 해제에 대해 미국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1, 2차 정상회담을 비롯해 이번 판문점 회동 직후에도 “우리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해 준 것’이 바로 ‘제재 해제’다. 또 최근 북한을 공식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약속해 북한 입장에서는 경제난의 한 고비를 넘겼다. 이번 판문점 회동처럼 북·미 관계가 좋아질 경우, 중국 정부로선 트럼프 행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대북 지원에 적극 나설 수 있다. 우리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에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를 적극 요청하고 나선 것도 북한에게는 긍정적인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2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눈앞에 빤히 보이는 개성공단이 남북 경제와 우리 안보에 가져다주었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밝혔다.

협상 테이블의 주제는 다시 ‘비핵화’로 모아졌다. 우선 북측 파트너가 바뀌었다. 비핵화 협상을 주도하는 곳이 통일전선부에서 외무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정보기관 특유의 ‘통 큰 결정’이 사라지는 대신 정교한 협상이 들어설 자리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측이 다양한 국제 외교행사에서 자연스럽게 회담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당장 양국 실무팀은 8월초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북한은 그동안 서로 상대편 협상팀을 이끌고 있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김 부위원장을 교체했다는 것은 협상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金, ‘영변 폐기’ 카드면 충분할 것으로 착각

판문점 회동 이후 미국 내에서는 때아닌 ‘핵동결’ 의혹이 불거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래 핵과 자국을 향해 날아오는 동창리 미사일 발사대 폐기에만 초점을 맞출 거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최근 ‘북한의 핵동결을 목표로 하는 새 대북 협상안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쟁점이 됐다. 관련 보도가 나오자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관련 사실을 부인하며 “미국의 최종 목표는 완전한 비핵화”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 논란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자신의 외교적 치적으로 삼기 위해 서둘러 협상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비롯됐다. 부승찬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북·미가 서로를 향해 설정한 ‘악마화(化)’ 프레임이 깨진 게 이번 만남의 획기적 변화”라고 말했다.

비핵화를 위한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해제’가 서로 맞교환 카드로 부적절하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발사대 폐기 역시 협상 카드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 핵시설의 핵심인 영변과 인근 지역 핵실험장 폐기가 현재로선 불가피하다. 부 전문연구원은 “영변 핵시설 폐기는 북한 비핵화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미국 및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풀도록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전 로이터 등 주요 외신과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 전부가 검증하에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미 회담과 비핵화 과정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으면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 경제협력도 탄력을 받을 것이며, 국제사회도 유엔 안보리 제재의 부분적 또는 단계적 완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청와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관련해 “그것은 하나의 단계다. 아마도 올바른 방향으로의 한 걸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북한에 대한) 제재가 해제된 것은 아니지만 서두르지는 않겠다”고 말해 제재 해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있어 탄력적으로 접근할 뜻을 내비쳤다.

 

“비핵화 위한 일정표 짜는 게 중요”

전문가들은 비핵화를 위한 로드맵 또는 시간표(Time Table)를 짜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근 서울대 교수는 “지금까지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었기에 비핵화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라면서 “비핵화를 구두로 약속한 뒤 미국이 체제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또 다른 논란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래 핵인 ‘시설’, 현재 핵인 ‘물질’, 과거 핵인 ‘무기’ 폐기 순으로 로드맵을 짜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는 초대 6자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한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아이디어다. 외교 소식통들은 이 의원과 친분이 두터운 비건 대표가 하노이 회담에서 이 방안을 제시했지만 북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고 말한다. 현 시점에서 비핵화를 위한 포괄적 합의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핵폐기가 비핵화의 최종 목표임을 정확하게 한 뒤, ‘영변 핵시설 폐기→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 국제사회 사찰 및 검증→ 한반도 전략자산 철수·대규모 군사훈련 영구 중단’ 순으로 단계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포괄적 합의 후 단계적 이행’ 시나리오가 현재로선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얻어야 할 이익도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중재자 역할은 미국과 북한 모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관광분야는 현재 유엔 제재 대상이 아니다. 이는 북한 정권이 숙원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 원산 갈마지구 개발사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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