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이삼평 백자, 메이지 유신 성공의 기틀을 만들다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jongseop1@naver.com)
  • 승인 2019.07.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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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정유재란 때 끌려간 이삼평, 도자기의 고향 아리타 역사 열어

일본 보수우익 논조의 대표 격인 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객원논설위원이 일본인들의 역대급 망언 리스트에 최근 또 하나를 추가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한국이 경제협력자금으로 받은 3억 달러가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한국이 이만큼 풍요로운 나라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것에 대해 일본의 협력이 얼마나 기여했는지 그걸 (한국인들한테) 정확히 좀 알려 달라.” 구로다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1965년도 이후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한·일 간에 협력관계를 시작한 거예요. 특히 경제적으로. 그 결과가 지금 한국 발전의 기초가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로다의 이런 논리라면 일본이야말로 한국 덕분에 경제를 살리고 지금처럼 잘살게 된 나라다. 지난 2005년 아소 다로 당시 일본 총무상, 현재 부총리 겸 재무상은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게도, 정말 운 좋게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전쟁 당시 어마어마한 전쟁 특수를 누렸다. 억지로 항복을 선언한 패전 이후 대공황의 위기마저 거론되었던 경제는 군수물자를 판매하면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그래서 아소 다로의 외조부이자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라고까지 말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이었으므로, 일본이야말로 오늘날의 번영은 온전히 한국 덕분이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 논리로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해 근대화를 이룩한 자체가 한국 덕택이었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장 먼저 보낸 전리품 중에는 경남 김해(金海) 향교(鄕校)의 도자기 제기(祭器)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기 제기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에게 바칠 밥을 담는 밥공기, 즉 멧사발이나 김치와 깍두기를 담는 보시기(사발보다 조금 작은 그릇)였지만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차사발로 용도가 달리 쓰였다. 일본 국보인 이도다완도 이런 멧사발과 보시기의 하나였다.

ⓒ 조용준 제공
전국시대 모습을 재현한 아리타 도자기 축제의 퍼레이드 ⓒ 조용준 제공

임진왜란 때 수탈로 황폐화된 조선의 도자산업

그래서 일본 각지의 다이묘(유력자·영주)마다 서로 경쟁하듯 사기장은 물론이요 조선의 멧사발들을 약탈해 깡그리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니 이렇게 털린 곳은 김해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광해군 시절에는 궁중연례 때 사용할 청화백자 항아리가 없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이를 구하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은 적어도 몇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왕실 제사마저 지내기 힘들 정도로 제기는 물론 각종 도자 그릇들이 통째로 노략질을 당했다는 것이 그 하나요, 전란 후의 조선이 상당 기간 도자기를 굽는 가마를 운영하기 힘들 정도로 사기장도 없는 데다, 가마터는 파괴되고 청화(靑華) 등의 안료마저 확보하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이 그 둘째다.

웬만큼 이름난 사기장들은 거의 납치됐으므로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던 기술 전승의 맥이 끊어진 데다, 관련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도자산업 전체가 단절되고 괴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0년 동안 강제 납치된 사람은 많게는 10만 명에서 적게는 3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조선의 가마터는 피폐해지고 굴뚝의 연기마저 끊어질 정도가 됐다. 하지만, 규슈의 히젠 지역에는 마치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 런던처럼, 혹은 한창 번창할 때의 도자기 도시 스토크 온 트렌트(Stoke on trent)처럼 곳곳에 세워진 가마의 굴뚝들에서는 도자기를 굽는 연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나카지마 히로이키(中島浩氣)가 1936년에 지은 《히젠도자사고(肥前陶磁史考)》에 들어 있는 히젠 지방의 옛 가마터에 대한 ‘히젠고요분포도(肥前古窯分布圖)’에 의하면 조선 사기장들이 히젠에서 연 가마만 무려 370군데가 넘는다.

눈 아래로 집들이 빗처럼 촘촘하네(眼底家如櫛)

가마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모락모락(窯煙起脚間)

솔바람은 예로부터 불어오는가(松風自萬古)

이씨 조상이 도산(陶山)을 어루만지는구려(李祖鎭陶山)

ⓒ 조용준 제공
이삼평 이후로 아리타에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자 번주는 조선 사기장을 제외한 일본인 사기장을 추방했다. 사진은 도자기 축제 때의 아리타 풍경 ⓒ 조용준 제공

1918년 당시 아리타초(有田町)가 속해 있던 사가(佐賀)현 니시마츠우라군(西松浦郡) 군수 가시타 사부로(樫田三郞)가 언덕에서 아리타 마을을 내려다보며 읊었다는 이 한시는 도자기 가마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마을 전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이씨 조상’은 바로 일본 도자기 종사자들이 도자기의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도조(陶祖) 이삼평(李参平·출생년 미상·~1655)이다. 사가번(佐賀藩) 초대 다이묘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1538~1618)에게 붙잡혀 일본에 끌려온 조선의 사기장이다. 이때 함께 납치된 사기장의 수만도 대략 155명이었다고 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임진왜란 때 제2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장수로 본대보다 더 많은 1만20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함경도로 진격해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북관대첩에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에게 크게 패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제4진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했고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는 기요마사를 구원하기 위한 8만 명의 구원병 총사령관으로 조선-명나라 연합군을 무찔렀다.

이삼평은 정유재란 끝 무렵인 1598년(선조 31년·공주대 윤용혁 교수의 학설) 일본에 끌려갔고 처음에는 가라츠(唐津) 부근에서 도기를 제작하다가 나중 나베시마 번주의 가노(家老) 타쿠야 스토시(多久安順·1566~1641)에게 맡겨졌다. 다쿠야 스토시는 원래 이름이 류조지 가쿠(龍造寺家久)였으나, 나베시마의 둘째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다쿠(多久)읍의 초대 읍주(邑主)가 된 다음에는 이름을 다쿠야 나가토 스토시(多久長門安順)고 바꿨다. 다쿠는 지금은 시(市)로 승격해 사가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이삼평은 아리타로 옮겨가기 전에 가라쓰를 거쳐 다쿠에서 10여 년쯤 머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간에 이삼평이 만들었던 도자기 ‘다쿠고카라쓰(多久古唐津)’는 그냥 ‘다쿠카라쓰’라고도 한다. 가라쓰 도자기의 한 종류인 ‘에카라쓰(絵唐津)’ 혹은 ‘가라쓰미시마(唐津三島)와 비슷하다.

하여튼 이삼평은 가라쓰야키류(類)의 제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선의 것과 같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아리타(有田)의 이즈미산(泉山)에서 백자광을 발견, 그의 나이 38세가 되던 1616년(광해군 8년) 무렵 변두리 시라카와(白川)에서 덴구타니요(天狗谷窯)를 열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본 최초의 백자 도자기, 이전의 일본 땅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고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만드는 방법도 몰랐던 그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덴구타니(天狗谷) 가마는 모두 계단장연방식등요(階段狀連房式登窯)로 모두 5기가 발견됐다. 가마 규모는 전장이 52m 정도며 16개 소성실과 연소실이 있다. 이 가마는 도기가 아닌 자기를 전용으로 굽는 것으로, 일본 최초의 자기 가마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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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다이묘 모습의 1700년대 초기 이마리 도자기 인형(아리타 겐에몬 박물관)
백자로 만든 이삼평(아리타 겐에몬 박물관) ⓒ 조용준 제공

아리타, 이삼평이 가마 연 후 수많은 사기장 집결

이삼평은 이후 일가족 18명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해 도자기의 고향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다. 아리타는 이삼평이 가마를 연 후 수많은 사기장들이 집결해 번영을 거듭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도자기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1590년만 해도 심산궁곡으로 지도에 나오지도 않았던 ‘다나카 마을(田中村)’이 30여 년에 걸쳐 팽창을 거듭해 번듯한 성시(成市)로 자리 잡았다. 1680년대 지도에는 아리타라는 지명도 등장한다.

이삼평에 의해 도자기 생산공정이 현재의 분업제와 비슷한 작업 시스템으로 정착하고, 도자기가 막강한 부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성장해 나가자 나베시마 번주는 크게 기뻐하며 이삼평에게 가나가에 산페에(金ヶ江三兵衛)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다쿠야 스토시(多久安順)는 자신의 하녀와 이삼평을 결혼시키기에 이른다. 가나가에(金ヶ江)라는 성은 이삼평이 금강(金江)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산페에(三兵衛)라는 이름은 ‘삼평’의 발음을 차용한 것이다.

경이적인 돈벌이에 현혹된 일본인들도 도처에서 가마를 만들기 시작하는 등 아리타에 사람이 너무 몰려들자 나베시마 번청(鍋島藩廳)은 급기야 산림이 마구잡이로 베어져 황폐화되는 것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1300도 넘는 가마불을 지피려면 땔감이 엄청나게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635년에는 관리를 파견해 아리타 사라야마(有田皿山)의 지배권을 확립해 통제하기 시작했고, 1637년 3월20일에는 조선 사기장이 아닌 일본 사기장을 쫓아내는 추방령을 발동한다. 그리하여 아리타에서 7개 가마, 이마리에서 4개 가마 모두 11개 가마의 일본인 남녀 사기장 826명(남자 532명, 여자 294명)이 문을 닫고 추방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리타에서 값싼 도기는 없어지고 자기 중심의 생산체제가 확립되었다.

일본인은 조선 사기장 밑에서 배운 내력이 확인된 사람에 한해 일부 면허증이 발급됐다. 1647년 공식 기록에 남은 사기장 집안은 155가구였고, 이들은 모두 이삼평의 총괄 감독을 받았다. 1600년대의 시골 조그만 마을에 도자기를 굽는 가구 수만 155개라니 실로 경이로운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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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기 탄생 400주년이었던 2016년 도조제 모습 ⓒ 조용준 제공

일본 유일 청화백자 도리이(鳥居)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

이삼평을 모시는 도산신사(陶山神社)는 아리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얕은 산중턱에 있다. 도산신사는 마을에서 올라가다 보면 우선 계단을 오르고 중간에 특이하게도 철길 건널목을 지나야 한다. 철길을 건너면 조그만 광장이 나오고 다시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그 계단을 거의 다 올라서면 비로소 아름다운 도자기로 만든 도리이가 나타난다. 연한 블루의 당초무늬가 있는 일본 유일의 백자 도리이다.

1656년 아리타 주민들은 니리무라(二里村)의 오자토(大里)에 있는 하치만구(八幡宮)의 응신천황(應新天皇) 신체를 받아서 오타루(大樽) 언덕에다 아리타야마쇼우보하치만구(有田山宗廟八幡宮)를 건립할 때 이삼평과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합사해 모셨다. 그러다가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현재의 장소로 옮기고 이름도 도산신사로 개칭했다.

일본 최초의 백자 탄생 300주년이 되는 1917년에는 드디어 아리타 시내를 내려다보는 렌게이시산(蓮花石山) 정상에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를 세웠다. 이후 이곳에서는 매년 5월4일 도자기의 번영을 기원하는 ‘도조제(陶祖祭)’가 열린다. 물론 이를 세울 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인의 기념비를 일본 신인 하치만(八幡)을 모신 신사 위에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아리타 주민들은 이를 감행했다. 나베시마 후손들의 찬조를 얻어 이씨송덕회(李氏頌德會)를 조직하고, 송덕회 명예총재로 사가현 출신이자 8대와 17대 총리를 지낸 거물급 정치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를 추대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액의 기부금이 모여 그해 12월에 이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당시가 일제 강점기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 실감이 될 것이다.

비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조용준 제공
도산신사 입구의 청화백자 도리이. 높이 3.65m에 폭은 3.9m다. ⓒ 조용준 제공

아리타 도자기로 이룬 부(富)가 메이지 유신 성공 주축

…드디어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석(瓷石)을 발견했다. 그 후 시라가와(白川)로 이주해 처음으로 순백의 자기를 제작한 것이다. 실로 이것이 일본에서 자기 제조의 시작이다. 그 후 줄곧 그 제조법을 계승해 오늘의 성황을 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이씨는 우리 아리타의 도조일 뿐만 아니라 일본 요업계의 대은인(大恩人)이다. 그리하여 도자기업에 종사해 그 은혜를 입고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이씨가 남긴 공적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인 사기장 이삼평은 누가 뭐래도 아리타 도자기에 있어 영원히 잊힐 수 없는 대은인의 존재였다. 이삼평 이후 사가번은 일본에서 가장 근대화에 앞서 나간 지역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메이지 유신 성공의 주축이 되었다. 저명한 소설가로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사상가로 통하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1923~1996)는 이렇게 지적한다.

“20년 남짓한 시기에 사가번의 군사력은 경이적으로 강화되고 발달했다. 반사로(反射炉·금속 제련을 위한 가마)도 도쿠가와 막부보다 7년 빨리 완성해 신예의 총포를 제조하고, 최신예 암스트롱포(砲) 3문을 영국으로부터 구입하는 한편 동일한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군함도 몇 척 구입했다.”

그리하여 막부 말기 사가번의 군사력은 당시 세계 최강 프러시아와 필적했다고 시바 료타로는 쓰고 있다. 또한 사가번주 나베시마 칸소우(鍋島閑叟) 자신이 측근에게 말하기를, 우리 번이 다른 번과 싸워도 우리는 한 명의 병사로 수십 명의 적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구입하는 사람의 경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시바 료타로는 무기 구입 금액이 연간 15만 석에 해당한다고 보았는데, 그 대부분이 번이 전매하는 아리타 도자기의 밀무역을 통해 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에노(上野) 전투에서 막부군을 괴멸시키고, 막부가 마지막 거점으로 삼은 아이즈(会津) 와카마쓰성(若松城)을 함락시킨 것도 사가번의 암스트롱포였다. 또한 막부의 마지막 세력으로 해군인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함대를 하코다테(函館) 고료카쿠(五稜郭)에서 무찌르고 막부 토벌전을 끝낸 것도 사가번 해군이었다.

아리타 역사는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도자기가 가져온 것임을 우리 아리타 마을 주민은 명심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この大砲も軍艦も吾が有田の磁器がもたらしたものである事は有田町民として銘記すべきことと思うのである。)”

※ ‘도자기 세계사’는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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