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만 있으면 나도 파일럿?…유행처럼 번지는 ‘항공유학’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6 17:00
  • 호수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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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해진 입사 경쟁에 ‘비행낭인’ 증가 걱정도

국내 직장인들 사이에 ‘항공유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고액 연봉과 안정된 정년이 보장되는 파일럿이 ‘신(神)의 직업’으로 각광받으면서, 한국보다 조종사 자격증을 따기 쉬운 미국 항공학교로 진학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미국 항공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퇴직금에 대출금 등 거액을 얹어 유학길에 오르는 이들까지 생겨난 가운데,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파일럿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신기루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국내 파일럿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비행낭인(조종사 면장이 있어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7년 A씨는 3년간 재직했던 한 대기업에 사표를 던졌다. 당시 나이 서른, 받고 있던 연봉만 5000만원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였기에 관두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A씨는 경직된 사내 문화와 격무에 지친 끝에 퇴사 결심을 굳혔다. 그 뒤 그가 ‘인생 2막’ 직업으로 선택한 것은 파일럿이다. 몇 달간의 짧은 준비 후,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A씨는 2년간 미국에서 비행시간 300시간을 채운 뒤 올해 6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입국 후 그는 국내 저비용항공사(LCC)에 입사하기 위해 ‘파일럿 취업준비생’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 일러스트 김세중
ⓒ 일러스트 김세중

부장부터 대리까지…줄 잇는 항공유학

A씨는 “대기업을 다닐 때 처우는 괜찮았지만, 반복되는 야근과 군대식 문화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한 지인으로부터 ‘파일럿의 근무환경이 정말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알아보니 미국에서는 파일럿 자격증을 따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도전하는 마음으로 사표를 던졌다”며 “졸업하기까지 약 1년8개월 정도 걸렸는데 그사이 학비와 생활비를 합쳐 10만5000달러(약 1억2300만원) 정도 썼다. 적금을 깨고 퇴직금에 마이너스통장까지 끌어 썼지만, 보장된 미래를 위한 초기투자 비용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A씨처럼 인생 두 번째 직업으로 파일럿을 꿈꾸는 이들은 적지 않다. 평균연봉 8000만원 이상의 대우와 65세 정년 등이 파일럿의 매력으로 꼽힌다. 문제는 복잡한 취득 과정이다. 파일럿이 되려면 여러 자격이 필요하다. 우선 비행실습 총 250시간을 채워 상업용 면허(CPL)를 취득해야 한다. 또 항공사 여객기는 다발엔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다발엔진 자격도 취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계기비행자격(IR)을 취득하게 되면 전문 민항 조종사의 최소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 중 비행시간을 충족하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인데, 미국에서는 ‘돈’만 있다면 비행실습 시간을 국내보다 훨씬 빠르게 채울 수 있다는 게 업계 종사자들의 전언이다. 미국 항공학교 진학 시 빠르면 1년 내외로 CPL을 취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유학을 하면 영어 회화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장점 덕에, 미국이 예비 파일럿들의 단골 행선지가 된 것이다.

이에 서울 유학원들은 미국 항공유학을 위한 별도 프로그램까지 개설해 놓고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7월10일 서울 종로의 한 유학원에 항공유학 상담을 요청하니 “지난 연말에 항공유학 설명회를 열었는데 100명이 넘는 인원이 몰렸었다. 40대 부장님까지 파일럿이 되겠다고 찾아왔다. 매년 수강생이 늘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준비하는 게 유리한 상황”이라고 했다. 비용이 걱정된다는 말에는 “미국 학교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당연히 적지 않게 돈이 든다. 하지만 1년 내내 복권 살 바에는, 연봉과 정년이 보장되는 파일럿을 준비하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 아니겠나”라고 되물었다.

과연 항공유학은 창창한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실제 국내 파일럿 시장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우선 항공시장의 규모가 매년 팽창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등 대형 항공사를 필두로 제주항공, 진에어, 에어부산,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이 매년 늘어나는 관광 수요를 소화하기 위해 파일럿 채용에 힘을 쏟고 있다. 여기에 올해 초 면허를 취득한 신규 LCC 3인방인 에어프레미아, 에어로케이, 플라이강원의 가세도 예비 파일럿들에게는 호재다. 항공사가 늘어나는 만큼 채용 규모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에 파일럿의 몸값은 더 치솟게 될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높아진 파일럿 ‘몸값’에 경쟁률도 ‘껑충’

그러나 일각에서는 현 시점의 항공시장 상황만으로는 수년 뒤 파일럿 채용시장까지 예단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장 우려되는 건 매년 치솟는 파일럿 수다. 최근 국내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 취득현황을 살펴보면 △2014년 868명 △2015년 1012명 △2016년 1228명 △2017년 1460명 △2018년 1544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5년 전과 비교해 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예비 파일럿들이 약 2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최근 항공유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터라, 수년 후 이 수가 얼마만큼 뛸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항공사 입사경쟁률이 크게 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최근 정부가 마련한 ‘선선발 후교육 제도’도 항공유학생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선선발 후교육 제도란 국내 항공사에서 비행 라이선스가 없는 개인을 파일럿 후보생으로 선발한 후 비행훈련 과정을 이수하게 하는 제도다.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과도한 비용을 들여 항공유학을 한 뒤 한국에 들어와 취직에 실패하는 ‘비행낭인’을 줄여보겠다는 셈법이다. 그러나 이미 미국 항공대에서 유학 중이거나 유학을 끝낸 뒤 국내에서 항공사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겐 비보(悲報)다. 파일럿이 되는 경로가 다양해질수록, 항공사 입사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파일럿이 되기 위한 시간과 비용은 증가하는 추세다. 혹여 취업에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부수적인 스펙(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 혹은 업적)을 쌓는 경우가 늘어나서다. 제트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면장인 ‘JET Rating’을 1500만~2000만원 가까이 들여 취득하거나, 영어회화 교육을 따로 받는 식이다.

지난해까지 대한항공 부기장으로 재직했던 한 파일럿은 “단순히 항공사의 파일럿 수요만 보고 함부로 유학을 결정해선 안 되는 게, 대형 항공사의 경우 경력을 많이 쌓은 외국인 조종사를 계약직으로 데려와 채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여기에 대형 항공사 부기장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LCC로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항공사를 막론하고 신입 파일럿이 들어오는 문턱이 생각보다 낮지 않다는 것”이라며 “비행을 사랑해서 파일럿을 선망하는 게 아니라 마치 노후 대비 수단처럼 직종의 전망만 바라보고 파일럿을 준비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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