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인터뷰①] “수출 성장에서 내수 성장으로 정책기조 바꿔야”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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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주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길을 묻다(24)]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①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⑯박관용 전 국회의장 ⑰송기인 신부 ⑱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⑲임권택 감독 ⑳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21 이문열 작가 22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 23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24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 시사저널 박정훈
ⓒ 시사저널 박정훈

세계 각국 중앙은행은 독립성이 생명이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그래서 붙는다. 중립성이 중요하기에 교수 출신들이 수장에 많이 오른다. 벤 버냉키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프린스턴대 교수)이나 라구람 라잔 전 인도중앙은행 총재(시카고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권위주의 시절, 한국은행은 ‘재무부 남대문출장소’ ‘기획재정부 통화국’이라는 오명을 듣던 때가 있었다.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있다 보니, 경제 관료나 시중은행 은행장 출신들이 임명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4년 임기를 보장받았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 임명된 조순·김명호·이경식 등 3명의 총재는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하차했다. 한은의 정치적 위상이 약해지자 한국 경제엔 ‘IMF(국제통화기금)’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외환위기와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은행 총재 자리를 전철환 충남대 교수에게 맡겼다. 그리고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4월 박승 중앙대 교수를 차기 총재로 임명하는 파격을 연출했다.

박승 교수가 신임 총재로 내정됐을 때 한은 안팎에서의 반응은 냉담했다. 박 신임 총재가 저개발국가 성장모델을 연구해 온 ‘성장론자’로 알려진 데다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역임했기에 중앙정부의 코드에 맞출 거라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해 12월 대선이 치러진다. 인위적인 경기부양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4월1일 취임사에서 그는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확고히 지키고 그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강조해 우려를 말끔히 지웠다. 지나간 일이지만 중앙은행 독립은 박 전 총재의 오랜 소신이었다. 지금도 한은 직원들은 박 전 총재를 ‘가장 존경하는 한은 총재’로 꼽는다. 5년 전 박 전 총재 자택을 찾았을 때 2006년 3월 한국은행 제주본부 직원들이 만들어준 액자가 서재에 걸려 있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한국은행과 한국은행 직원을 가장 사랑한 총재님, 한국은행 독립성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총재님,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심 없이 고뇌한 총재님. 2006년 3월31일 한국은행 제주본부 직원 일동”.

“한은 직원들이 가장 존경했던 총재”

박 전 총재는 이념적으로 중도에 속한다. 진보, 보수 양측 모두에게 인정받는 몇 안 되는 경제원로다. 일찍부터 박 전 총재는 수출주도형인 한국 경제에 우려를 표시했다. 지금은 상상조차하기 힘들 정도로 8.3%의 고성장을 기록하던 1994년 8월, 중앙대 교수였던 박 전 총재는 언론 기고를 통해 한국의 수출주도형 고성장 경제가 엄청난 환경변화에 직면할 것임을 예고하면서 “과감하고 지속적인 성장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다. 박 전 총재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7월4일 서울 평창동 한 호텔 커피숍에서 시사저널과 만난 자리에서 박 전 총재는 “지금의 저성장을 받아들이되 내수를 키워 양질의 저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경제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총재님도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아요. 경제의 기본체력 즉, 거시 건전성이 위험할 때 ‘위기’란 말을 써야 하는데 현재 물가, 국제수지, 재정 건전성이 모두 양호합니다. 다만 일자리, 사회 양극화 문제로 체감경기는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체감경기는 일시적인 것이기에 정책적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흔히들 2%대의 낮은 경제성장률을 두고 위기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나이 들면 체력이 떨어지듯 당연한 과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정부는 전임 정부 탓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는 구조적 전환기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는 수출, 인구, 투자가 늘어나는 시대가 아니라 줄어드는 시대예요. 사람으로 치면 노화 단계에 들어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령 올해 2% 초반대 성장을 기록하는데 이게 정상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해요. 일본, 독일 등 선진국의 평균 성장률은 1.7%에 불과하거든요.”

저성장이 당연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지금은 2%대, 앞으로 수년 지나선 1%대 성장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쩌면 10년 후엔 일본이나 독일처럼 0%대로 갈지 모릅니다. 다만 저성장을 받아들이되 실업 문제와 양극화 문제가 해소되는 ‘양질의 저성장 경제’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저성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국민 감정으론 쉽지 않죠. 그렇기에 일자리하고 양극화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의 모든 문제는 수출주도성장이 끝나면서 시작된 거예요. 그동안 두 자릿수로 늘어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수출이 지난 8년간 연평균 증가율이 -0.4%였어요. 수출성장이 끝나자 당장 무너진 게 제조업이에요. 그동안 제조업은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매년 20만 명 이상의 고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장률이 2~3%에 그치면서 해마다 10만 명 내외의 고용이 줄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큰 폭으로 늘던 투자까지 줄어들고 있지요.”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탈바꿈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정부는 ‘제조업 르네상스(부활)’를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겠지만, 동시에 탈(脫)제조업으로의 산업구조 개편도 병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공지능·바이오·로봇 등 4차 산업 부문과 의료·보건·교육·관광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이 성장을 이끌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벌은 개혁 대상인 동시에 지원 대상이에요. 현실적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중심 동력 역시 재벌이라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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