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를 둘러싼 묵직한 울림 《나랏말싸미》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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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생 앞에 섰던 세종의 의로움 집중 조명한 영화

유네스코 지정 기록유산인 훈민정음. 우리가 소리 내 발음하는 것들을 한자가 아닌 독창적 문자 체계로 기록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고 쓰는 한글의 뿌리. 이것이 조선시대 성군인 세종 때 완성됐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엔 정사(正史)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글을 둘러싼 해석 역시 그간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나랏말싸미》는 세종을 도와 우리글을 만들었던, 역사에 가려졌던 인물들을 조명하는 팩션(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여 만든 장르)이다. 그간 드라마와 영화에서 수차례 다뤄진 세종의 이야기와는 또 다르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세종의 두 조력자들

극 중 세종(송강호)의 시대는 잘 알려졌듯 유자(유교를 따르는 사대부)들의 시대다. 글은 이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은 누구나 쉽게 읽고 쓰는 글자를 만들고자 하지만,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쉽지 않았다. 이 고민을 곁에서 지켜보던 소헌왕후(전미선)는 직접 수소문해 신미 스님(박해일)을 불러들인다. 고려를 망하게 했다는 이유로 불교는 강력하게 박해당하던 시대, 소헌왕후는 궁 안에 은밀히 불당을 차려놓을 정도로 부처에 대한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신미는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파스파어 등 문자에 능통하다. 고려의 국난을 극복하려고 승려들이 법문을 새긴 팔만대장경 안에 1500년 전 소리와 문자를 분류하고 집대성한 원리가 있다는 것도 꿰뚫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리가 분명해 태도 역시 꼿꼿하고 자존심이 세다. 세종 앞에서도 쉽게 굽히지 않는 면에서 그런 그의 심성과 태도가 엿보인다. 스스로 유자들 사이에서 “개 취급 받는다”고 표현하는 신미는 특유의 반골 기질로 세종과 부딪치기도 하지만, 결국 그를 도와 글을 만들어 나간다. 신미를 필두로 학조(탕준상), 학열(임성재) 등 여러 스님이 힘을 보탠다.

신미는 《나랏말싸미》 제작진이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새롭게 재창조한 실존 인물이다. 세종이 유언으로 신미 스님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라는 법호를 내린 데서 착안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왕과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던 스님의 만남. 낮은 곳까지 이롭게 하려던 세종의 정신이 녹아든 해석이다.

때론 대립각을 세우는 두 사람을 하나로 잇고 과업을 완수하려는 사람은 소헌왕후다. 그 역시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됐다. 그는 세종의 고민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하며 상황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인물이다. 극 중 신미의 말을 빌리면 “진짜 대장부” 역할을 해내는 이도 그다.

소헌왕후는 힘겹게 탄생한 우리 글자 ‘언문’이 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궁녀들을 통해 그 식솔들에게 글자가 전파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 할 수 없는 까막눈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힘 있게 말하는 그에게서는 어진 심성과 기품이 느껴진다. 세종과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아내로서의 모습 역시 왕후의 서사에 깊이를 더한다.

특히 소헌왕후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배우 전미선의 생전 마지막 역할이라는 점에서 마음을 울린다. 스크린 안과 밖의 이야기가 공명하는 지점이 있기에 그의 연기는 단순히 연기로만 보이지 않는다. 조철현 감독은 언론시사회 후 기자간담회를 통해 “백성들은 더는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라는 극 중 소헌왕후의 대사가 배우 전미선이 만들어낸 것임을 밝히며 그를 기리기도 했다.

영화는 한글 창제 과정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 어금니 소리, 잇소리, 혀 소리 등 하나하나 그 울림을 따져가며 점과 선으로 글자를 완성하려 한 이들의 노고가 그려진다. 괜한 웃음과 감동을 불러 이끌어내지도 않는 시종 진중한 접근법을 보여준다. 다만 이 영화는 세종과 가려졌던 인물들의 빛나는 성취로서 한글 창제의 과정을 주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용비어천가’를 자처하는 작품이 아닌 것이다.

 

한글 창제 자체에 집중한 정공법

이는 《나랏말싸미》가 세종을 다루는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애민정신에 기초한 성군이었다. 동시에 기득권을 유지하고 중전을 탄핵하려는 데만 몰두하는 신하들의 반발, 실명의 위기 등 무너져내리는 건강 등을 힘겹게 버텨내던 인간이었다. 영화는 저물어가는 생 앞에서 의로운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는 세종을 주목한다. 외로움과 고통이라는 파고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어이 옳은 일을 찾아가고자 했던 한 인물의 마지막 8년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나랏말싸미》는 세종과 신미 그리고 소헌왕후라는 세 꼭짓점에 주목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곁가지들은 최소화한 채 뜻을 모은 이들이 글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종의 뜻을 둘러싼 궁 안의 갈등은 그다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유자들의 반발은 일부 장면의 대사들로만 가늠할 수 있는 식이다. 궁 밖의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는지에 대한 묘사 또한 불필요한 대목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다만 첫 장면의 기우제와 누군가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제와 같은 당대 의식,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등 스크린에 처음으로 모습이 담긴 문화재들의 웅장함이 극의 깊이를 더한다. 판타지를 더한 팩션 사극에 익숙해진 요즘 같은 시대에 날아든 《나랏말싸미》의 정공법은 오히려 정성스럽고도 신선하다.

한국영화 ‘국왕열전’

한국영화에서 왕실의 이야기, 특히 왕의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극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등장했다. 세종의 이야기도 이미 여럿 만들어졌다. 다만 안현철 감독의 《세종대왕》(1964), 신성일이 주연한 《세종대왕》(1978)은 조선 왕조에서 성군으로 칭송받았던 그의 재위 시절 업적을 좇는 연대기적 구성에 그친다. 왕을 하나의 캐릭터로 이해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시도는 소설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하는 신상옥 감독의 1960년대 연산군 연작(《연산군》 《폭군 연산》)이다. 영화는 생모의 억울한 죽음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던 비운의 인물 연산을 이해한다.

왕을 비뚤어진 욕망을 지닌 야사의 주인공으로 기록한 영화들도 있다. 명종을 주목한 《내시》(1986)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팩션’은 더욱 다양한 묘사들을 가능케 했다. 정조의 암살설을 기반으로 한 《영원한 제국》(1995), ‘숨겨진 국새가 있다’는 상상력 안에서 고종을 새롭게 평가한 《한반도》(2006) 등의 작품이 있다. 《왕의 남자》(2005), 《음란서생》(2006), 《쌍화점》(2008) 등에서는 멜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국왕은 아니지만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처럼 새로운 지도상이 조명됐다. 현재까지 한국 박스오피스 흥행 순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명량》(2014)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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