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한센병 환자 가족'에도 배상 결정
  • 류애림 일본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9 16:00
  • 호수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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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국가 손해배상 판결에 항소 포기…“아베의 선거용” 지적

“저는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의 한센병 가족 국가배상 청구 소송 판결에 관해, 한센병 대책의 역사와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경험을 하신 환자 그리고 과거 환자 가족 모든 분의 고통에 공감하며, 극히 이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굳이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6월28일, 일본 구마모토 지방재판소는 한센병 환자 가족에게도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지난 7월9일 항소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7월12일 환자 가족에 대한 사과를 포함한 담화를 발표하며 이같이 말했다. 아베 총리는 정부로서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앞서 일본 한센병 환자 가족들은 ‘한센병 환자에 대한 국가의 격리 정책 탓에 가족이 강제로 흩어지게 되었고 차별과 편견을 받는 등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에 손해배상과 사죄를 요구해 왔다. 소송은 2016년 처음 제기됐다. 당시 한센병 환자 가족 568인이 원고로 나섰는데, 이 중 7명이 중간에 소를 취하하고 561명이 원고로 남았다. 이들 중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게 된 원고는 총 541명. 재판 과정에서 원고 20명은 ‘격리 정책 영향을 미미하게 받았다’는 이유로 배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재판부는 나머지 541명에 대해 위자료 30만 엔(약 330만원)을 일률적으로 산정하고 자녀와 배우자에게는 100만 엔(약 1090만원), 형제의 경우 20만 엔(약 220만원)을 일본 정부가 추가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일본 정부는 총 3억7675만 엔(약 41억원)을 한센병 환자 가족들에게 지급하게 됐다.

7월12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운데)가 한센병 환자를 가족으로부터 격리한 과거 정책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 REUTERS
7월12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운데)가 한센병 환자를 가족으로부터 격리한 과거 정책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 REUTERS

한센병 환자 이어 이번엔 가족 배상 판결

과거 ‘나병’으로 불린 한센병은 나병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만성 감염병이다. 일본에서도 나병 등의 용어가 차별적 의미를 가진다며 현재는 한센병으로 부른다. 1873년 나병균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사 한센의 이름을 땄다. 일본의 경우 1907년부터 나병 예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격리 정책을 실시했다. 1909년에는 도쿄와 오사카, 구마모토 등에 공립요양소를 개설했고 1931년에는 강제격리 대상을 모든 환자로 확대했다. 1952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강제격리 정책 재검토를 제언했지만 일본 정부는 1953년 새로운 나병예방법을 제정하고 격리 정책을 유지했다. 1996년 나병예방법이 폐지되면서 약 9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격리 정책도 막을 내렸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은 2001년 5월 이미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에서 내려진 바 있다. 이때 원고들은 국립한센병요양소의 강제격리 정책으로 인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며 한 사람당 1억1500만 엔(약 12억5400만원)을 국가가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법원은 늦어도 1960년대 이후에는 격리의 필요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격리 정책을 유지했다는 등의 이유로, 정부가 원고 127명 전원에게 총 18억2380만 엔(약 198억95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입소기간에 따라 한 사람당 800만 엔(약 8700만원)에서 1400만 엔(1억5300만원)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원고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격리 정책의 잘못을 전면적으로 지적한 판결이었다. 이에 원고 이외 과거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구제의 길이 열렸다.

일본 정부의 항소가 예상됐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 항소를 단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원고들과 면담 후 이 같은 결정을 내렸고, 이후 일사천리로 입법까지 이뤄졌다. 일본 국회에서는 배상을 위한 입법 계획을 밝혔고 2001년 6월15일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통칭 한센병 보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과거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의무가 국가에 있음을 명시하고 2006년까지 청구하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상자는 약 6000명이었다.

이후 ‘한센병 문제 해결 촉진에 관한 법’이 2008년 성립, 다음 해부터 시행됐다. 이 법에서는 국립한센병요양소 입소자의 의사에 반해 입소자를 퇴소시킬 수 없으며 요양소의 의료 등의 체계를 정비하고 입소자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한센병 환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립한센병 자료관을 설치하고 한센병과 한센병 대책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보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환자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이 이루어진 지 18년 만에, 이번에는 그 가족에 대한 국가의 피해보상 판결이 이뤄졌다. 사실 일본 대부분의 언론은 정부가 항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7월9일 조간 1면에서 ‘한센병 가족 소송, 항소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고 정부가 항소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은 정부 관계자를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일본 법무성, 후생노동성 등은 항소해야 한다는 의향을 밝혔던 것으로 추론된다. 남은 것은 아베 총리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취재 후 정부가 항소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기사를 내보냈지만 7월9일 오전 아베 총리는 항소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아사히신문은 정정보도를 하고 독자에게 사과해야 했다.

승소 판결이 나온 뒤 ‘승소’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이는 일본 한센병 환자 가족 ⓒ REUTERS
승소 판결이 나온 뒤 ‘승소’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이는 일본 한센병 환자 가족 ⓒ REUTERS

“항소 단념 높이 평가한다” 77%

다만 아베 총리는 담화를 발표하며 판결에 전부 동의할 수 없다는 정부 성명도 함께 발표했다. 정부 성명에서는 판결이 행정과 국회의 책임을 인정한 부분에 대해 “법률상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총리 담화와 정부 성명까지 이어지자, 원고 측도 항소하지 않기로 하면서 소송은 종결됐다.

정부의 항소 단념 방침을 일본 여야 모두 반기면서 높이 평가했다.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이루고 있는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는 “최종적인 구제가 지연되는 것보다 하루빨리 고통을 없애는 정치적 결단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아베 총리의 정치 결단을 지지했다. 야당인 일본 공산당의 고이케 아키라 서기국장은 “항소 단념은 당연하다”며 “나라가 가족에게 사죄하고 충분한 보상과 입법 조치를 포함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민당의 마타이치 세이지 당수의 경우 항소 단념을 지지하면서도 선거 기간 중의 판단에 “선거를 노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의혹을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 총리 담화가 발표된 후 7월13, 14일 양일 동안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아베 총리가 항소를 단념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는 대답이 77%로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의 10%를 크게 웃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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