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위기와 기회의 차이
  • 김재태 편집위원 (jaitaikim@gmail.com)
  • 승인 2019.07.22 09:00
  • 호수 155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날의 풍경은 무참하고 기괴했다. 카메라 앞의 사람들은 아무 감정이 없는 사이보그처럼 보였다. 7월12일 열린 일본의 수출규제 관련 한·일 실무급 대표자 회동 이야기다. 일본 측 대표 두 명은 한국 측 대표 두 명이 들어와 자리에 앉은 후에도 간단한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테이블 위에는 그 흔한 물컵도 없었다.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겠다는 일본 측 의도가 쉽사리 읽히는 이 장면에 한·일 관계의 현실이 그대로 녹아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가 시작된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나가고 있지만 상황은 여전히 캄캄하고 갑갑하다. 저들이 수출규제 카드를 꺼내든 배경에 우리로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아베 일본 총리는 수출규제에 대해 “한·일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그 ‘심각한 손상’이, 위안부 합의 문제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거의 없다. 위안부 합의에 대한 부정적 기류는 우리 국민들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강제징용 배상은 우리 사법부가 결정한 사항이다. 둘 다 어떤 권력자도 함부로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일본의 보복은 우리 국민과 국가의 존엄을 겨냥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적 대의(大義)일 뿐이다. 그 대의로 현실을 넘어서기에는 막힌 벽이 너무 높다. 작심하고 덤벼든 저들이 그런 설득에 넘어갈 가능성도 전혀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베 정부 관계자들은 일찍부터 ‘한국 경제가 아파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여기저기 수소문했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한국 경제의 약점을 찾았다는 얘기다. 

여러 다른 이유를 떠나, 약점을 찾아 공격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의 이번 조치는 우리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온 표현 그대로 ‘치졸하다’. 그렇다고 비겁하다며 마냥 화만 내고 있을 순 없다. 감정을 넘어 이성이 할 일을 차례차례 찾아나서야 한다. 외교 노력은 그것대로 하되,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노출시키고 있던 약점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부품·소재·장비 산업에서 뒤처져 있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약점을 보강할 장기 전략도 세워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국면은 분명히 어렵다. 당장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서둘러 협상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설령 협상이 잘돼 급한 불을 끈다고 해도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또 다른 약점을 잡히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마냥 목소리만 높이고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 상황은 더 힙겹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여론 확산으로 편의점과 대형마트에서 지난주 일본 맥주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10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편의점에 진열된 일본 수입 맥주 모습 ⓒ연합뉴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여론 확산으로 편의점과 대형마트에서 지난주 일본 맥주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10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편의점에 진열된 일본 수입 맥주 모습 ⓒ연합뉴스

지난 휴일에 무언가 살 것이 있어 집 근처의 편의점에 갔다. 안면이 있는 주인에게 일본 맥주 판매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물어봤다. 예전보다 확실히 매출이 줄어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서는 현재 여러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효과를 떠나서 큰 뜻을 위해 자신이 그동안 애용했던 것들을 애써 외면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 또 그런 마음들이 모여 우리가 더 강해질 수 있음도 분명하다.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국민들은 그렇게 국민이 할 일을 하고, 정부는 정부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이럴 때일수록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냉철하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