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끝내 펼치지 못한 ‘풍운아’의 꿈
  • 유지만 기자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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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전 국회의원 7월16일 별세...진영 떠나 쓴소리한 합리적 보수주의자

3선 국회의원으로 방송에서 정치평론가로 맹활약했던 정두언 전 국회의원이 유명을 달리했다. 7월16일 오후 4시20분경 자택 인근 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62세. 경찰은 정 전 의원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짓고 유족의 뜻에 따라 부검을 실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명박(MB) 정권의 개국공신이자 실용주의자였고, 개혁보수 세력의 선두주자였다. 스스로를 ‘풍운아’라고 불렀던 것처럼, 정 전 의원의 정치인생은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는 진영에 얽매이지 않고 쓴소리를 해 여야 모두로부터 한편으로는 외면받고 한편으로는 사랑받았던 드문 정치인이었다.

ⓒ 시사저널 고성준
ⓒ 시사저널 고성준

‘정권 창출 공신’에서 ‘아웃사이더’로

정두언 전 의원을 얘기할 때 MB정부를 빼놓을 수 없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다가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2000년 정계에 입문한 정 전 의원은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찾아와 도와달라는 이 전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서울시장 선거캠프에 합류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서울시장 선거를 승리로 이끌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회 입성에 성공하면서 정치적으로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캠프에 참여해 친이계의 핵심이자 ‘참모’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당시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의 검증에 참여한 뒤 “박근혜 후보와 최태민의 관계를 폭로하면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 했던 발언은 훗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새롭게 회자되기도 했다.

경선 이후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약하며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사실상 MB정권의 ‘제1참모’ 역할을 수행하며 정권의 개국공신 자리에 앉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이자 영남을 대표하는 이상득계, 민주화운동 경력을 자랑한 이재오계, 당내 소장파를 이끄는 정두언계로 나뉠 정도였다. ‘실세 중의 실세’였지만 영광의 날은 짧았다.

MB정부 출범 이후 이상득을 중심으로 한 ‘영포라인’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그는 순식간에 밀려났다. 이후 측근들의 권력사유화를 비판하면서 MB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당내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55인 선언’을 이끌며 이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6월 본지에 기고한 ‘[정두언 시론]MB님께’(시사저널 1494호 참조)란 글을 통해 “한동안 주군(主君)으로 모셨던 사람으로서 내 할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한다”며 “MB께선 권력을 마치 비즈니스해서 번 사유물처럼 생각하는 듯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사했다. 이른바 권력의 사유화”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고, 2010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해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이어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한 뒤 2012년엔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솔로몬저축은행 비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이상득 전 의원과 함께 기소됐다가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2013년 1월부터 10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수감생활과 이어진 20대 총선 낙선, 이혼은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그를 찾아왔다. 지난해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낙선 후에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밝혔을 정도였다. 이후 방송에서 정치평론가로 활약하며 서울 마포구에 일식집을 여는 등 인생 2막을 준비하기도 했으나 끝내 생을 마감했다.

2011년 10월10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시절 정두언 의원이 국민일보 빌딩에서 열린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 출판기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2011년 10월10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시절 정두언 의원이 국민일보 빌딩에서 열린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 출판기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참 아까운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정 전 의원 주변에선 그를 가리켜 ‘실용주의자’로 표현한다. 자질과 능력이 된다면 이념적 성향에 치우치지 않고 사람을 쓰는 스타일 때문이다.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믿고 일을 맡긴다. 한 야당 국회의원은 능력을 우선하는 그의 스타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MB정부 출범 직후였다. 정 전 의원이 나에게 ‘청와대로 들어와서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사실 나는 한나라당과 결을 달리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일만 잘하면 되지’였다. 그게 정두언의 스타일을 모두 말해 준다. 능력이 충분하다면 어느 누구라도 발탁할 수 있다는 ‘오픈 마인드’가 항상 있었다.”

그가 이 전 대통령의 참모를 했던 이유도 실용주의적 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 역대 대통령들이 항상 정치자금 문제를 겪어왔고, 상대적으로 이 전 대통령은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다. 2017년 쓴 책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시간》을 통해 역대 정권에서 발생한 비리 사건의 근본 원인이 정치자금이라고 꼽기도 했다. 집권 후 MB정권이 과거 정권의 문제점을 답습했고, 친인척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문제가 시작됐다고 봤다. 그는 책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기업가 출신이라 권력의 공공성에 유난히 취약했다”고 지적했다.

정치 외적으로도 여러 재능을 뽐냈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록밴드 활동을 했고 공식적으로 4집까지 음반을 낸 가수이기도 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선 《걱정말아요 그대》를 개사한 선거송을 직접 녹음했다.

정 전 의원은 마지막 가는 길에 남긴 유서에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짤막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끝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정 전 의원의 빈소엔 조문 시작 직후부터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 중인 이재오 전 의원도 빈소를 찾아 이 전 대통령의 입장을 전하며 “‘영어(囹圄)의 몸이 되지 않았다면 (정 전 의원을) 만나려고 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고 전했다. 야 3당 대표를 포함해 여야 의원들 다수가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이자 개혁실용주의자였고 직언을 마다 않던 그는 여야를 떠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빈소에서 만난 유성엽 민주평화당 원내대표는 “참 아까운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고 안타까워했다.

정 전 의원의 마지막 방송은 7월17일 오전에 방송된 SBS 라디오 《이재익의 정치쇼》였다. 그는 한·일 분쟁에 대해 “정치가 차분하게 논의돼야 하는데 무조건 반대만 하면 안 된다. 한·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보수·진보 이야기를 하고 이러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평소 고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성향대로였다. 이날 오후 정 전 의원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평소 그와 가까웠던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정 전 의원이 꿈꿨던 좋은 정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정치가 사회에 다시 한번 불붙듯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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