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경제 제대로 보면 日에 ‘무조건 굽히자’ 얘기 안 해”
  • 이종우 이코노미스트(전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02 14:00
  • 호수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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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op 10 전자업체 이익 합쳐도 삼성전자 절반 수준

한 달 전 일본이 반도체 소재에 대해 통관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역분쟁이 시작됐다. 처음 상황이 벌어졌을 때 많은 언론은 다툼을 벌여봐야 우리는 상대가 안 되니 빨리 굽히고 들어가 실리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과연 그럴까?

이번이 한국과 일본이 경제적으로 부딪친 첫 번째 경우다. 그동안 과거사를 둘러싸고 여러 번 정치적 마찰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다툰 적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나라의 경제력 격차가 너무 커 우리가 일본에 대항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우리를 경쟁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한국 경제가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이번엔 누구 말이 맞는지 무릎을 맞대고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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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줄어든 한·일 간 거시경제 격차

작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6932억 달러, 일본은 5조1670억 달러였다. 일본 GDP가 대충 우리의 3배 정도 된다. 인구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걸 감안해도 아직 두 나라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속도다. 1985년 이후 우리 GDP는 6.2배 증가했다. 그사이 일본은 1.7배 증가에 그쳤다. 일본이 1990년이 될 때까지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는 걸 감안하면 이후 20년 동안 얼마나 침체가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진국으로서 일본 경제의 위상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때 미국의 54%에 달하던 일본의 GDP가 지금은 34%에 그치고 있는 게 대표적인 모습이다.

1인당 GDP는 변화가 더 심하다. 작년 말 기준 한국은 3만1360달러, 일본이 3만9286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이른바 ‘30-50클럽(인구가 5000만 명을 넘고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는 국가)’에 들어간 나라가 일본이다. 1992년에 위업을 달성했는데 미국보다 2년 빨랐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후 27년 동안 일본은 3만 달러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간에 4만 달러를 넘은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환율 때문이어서 엔화가 약세를 보이자 다시 3만 달러대로 떨어졌다. 일본이 처음 3만 달러를 넘을 때 우리 1인당 GDP가 8000달러 정도였으니 그사이 한국 경제가 얼마나 빨리 성장해 왔는지 알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지표가 수출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수출을 중심으로 커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우리 총 수출액은 6048억 달러, 일본은 7384억 달러다. 대략 우리 수출액이 일본의 80% 정도 된다. 일본만큼 세계 수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적으로 바뀐 나라도 많지 않다. 1994년에 해당 비율이 가장 높았을 때 10.2%였지만 2014년에 4%까지 내려왔고 작년에는 3.3%가 됐다. 그사이 우리는 3.0%까지 올라왔다. 둘 사이의 격차가 0.3%포인트로 줄어든 것이다.

아직 절대 규모 면에서 한국과 일본 경제는 차이가 난다. 우리의 추격으로 그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64년에 도쿄에서 18회 올림픽이 열렸다. 일본 입장에서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얼마나 빨리 일어섰는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때 우리는 미국의 원조에 기대 경제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랬던 두 나라의 경제 간격이 지금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日 정부 때문에 日 회사 피해 볼 수도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전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산업이다. 1960년대에 일본이 전자를 가지고 미국에 대항했고 결국 미국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트랜지스터 제품을 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내놓고, 워크맨처럼 획기적인 제품을 만든 나라도 일본이다. 한국에도 전자산업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재 국내 산업 중 가장 비중이 높고, 2000년 이후 한국 경제를 실질적으로 끌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전자업계에는 10대 메이저 업체가 있다. 히타치가 가장 크고 미쓰비시 순이다. 소니가 4위 정도 한다. 작년 이들이 거둔 영업이익을 다 합친 게 278억 달러다. 한국의 삼성전자는 535억 달러다. 일본 상위 10개 전자회사의 이익을 다 모아봐야 삼성전자의 절반밖에 안 된다. 이런 모습이 작년에 처음이라면 반도체 경기 때문이려니 할 텐데 이미 2004년에 시작됐다. 지난 15년 사이 반도체와 핸드폰 경기가 어려웠던 몇 년을 제외한 대부분 기간에 삼성전자가 일본 대표 전자회사들보다 많은 이익을 냈다. 일본이 부품에서 강하지만 이를 집합해 제품화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반면 우리는 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일본이 자랑하는 장인정신도 이런 변화 앞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반도체 소재를 둘러싼 한·일 간 다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짐작하게 해 준다. 소재 공급에 차질이 생겨 한국 반도체 회사가 감산을 해야 한다면 반도체 가격이 올라갈 것이다. 반도체는 약간의 수급 차이에도 가격이 크게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30% 정도 감산한다면 당장 공급이 수요의 90%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가격이 지금의 3~4배 이상으로 뛸 것이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파는 양이 줄어도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손해 볼 게 없지만 반도체를 쓰는 일본은 입장이 다르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데 가뜩이나 수익이 좋지 않은 일본 전자회사들이 적자에 빠질 수도 있다. 일본 정부가 벌인 일에 일본 회사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현재 30-50클럽에 속해 있는 7개 나라다. 한국을 제외한 6개국은 지금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거나 과거 한 번은 세상을 흔들어놨던 나라들이다. 우리는 70년 전에 전쟁으로 모든 게 망가졌던 나라다. 그래도 지금 당당히 30-50클럽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년이 지난 1949년에 일본의 유가와 히데키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비록 전쟁으로 시설은 망가졌지만 과거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적 능력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당시 한국은 서울대를 국립대학으로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대학생 숫자도 2000명을 넘지 않았다. 그 차이를 극복하고 지금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제력이 됐다.

이번 경제분쟁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한·일 사이에 걸려 있는 많은 정치적 사안들의 운명이 달라진다. 경제적으로 승리하면 과거사 문제도 쉽게 풀릴 수 있다. 일본이 우리를 진정한 경쟁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살펴봤다면 무조건 굽혀야 한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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