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세·자녀 교육 위해 ‘국적 쇼핑’ 나선 부자들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4 08: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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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업체들 대놓고 편법 앞장서…외교부 “제재 방안 검토할 것”

“요즘은 병역 문제로 문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럽 이민과 관련한 세미나를 진행하던 강사가 말했다. 이민을 통한 병역 회피는 불법은 아니지만 병역 의무를 피하기 위한 편법으로 통한다. 하지만 강사는 이주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병역’을 말했다. 강사는 지중해 섬나라 키프로스 이민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나라예요. 6개월 안에 취득하실 수 있고요. 특히 법인세가 가장 낮아요. 사업하시는 분들에게는….”

‘국적 쇼핑’ 시대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 환멸을 느낀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틀에서 벗어나고자 ‘중립국’을 택한다. 소설에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명준의 비참한 삶이 묘사돼 있다. 지금은 다르다. 원하면 언제든지 국적을 바꿀 수 있다. 더 정확히는 풍족한 사람들만이 수억~수십억원에 달하는 해외 시민권을 딸 수 있다. 이를 도와주는 알선업체들은 이데올로기 따위를 국적 변경의 장점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핵심은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보낼 수 있느냐, 또는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느냐 등이다. 때론 병역 문제가 공공연히 언급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돈만 있으면 국적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

7월28일 낮 12시, 강남 한 호텔에서 열린 세미나 풍경도 비슷했다. 이민 알선업체 H사가 주최한 이날 세미나엔 5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이따금 젊은 사람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장년층이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강사는 “한국은 원칙적으로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지만, 65세 이상에겐 허용한다”고 설명했다. 강사가 띄운 PPT 화면 중 ‘이민 동기’란 제목의 슬라이드가 나왔다. 여기엔 ‘해외 진출’과 함께 ‘절세’ ‘병역’ ‘학업’ 등의 단어가 나열돼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 그리스, 몰타, 키프로스 등 유럽 각국의 이민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7월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호텔에서 진행된 H 이주 알선업체의 유럽 이민 관련 세미나 ⓒ 시사저널 공성윤
월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호텔에서 이민 알선업체 H사가 주최한 유럽 이민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 ⓒ 시사저널 공성윤

“의심받을 수 있으니 포르투갈 추천합니다”

세미나가 끝나자 “자산을 물려주려면 자녀는 어디 국적인 게 유리한가” “전과자는 죄목을 불문하고 아예 국적 취득이 제한되는가”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강사에게 따로 상담을 신청한 한 60대 여성은 “말레이시아가 세금 혜택이 많다고 해서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돈을 한꺼번에 보내면 세무 당국에 통보될 수 있다”는 조언이 따라왔다. 말레이시아는 증여세와 상속세가 없다. 이자소득세도 없다. 그래서 이민제도가 없음에도 ‘MM2H’라 불리는 장기 거주증을 따려는 사람들이 최근 늘어났다고 한다. 세금 문제는 대개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의 주요 이유로 꼽힌다.

한편 인터넷에선 ‘외국인학교 입학권’을 홍보 문구로 내건 이민 알선업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교육청에 따르면 자녀가 외국인이라도 바로 외국인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경우 ‘자녀가 3년 이상 해외에 체류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단 부모 중 한쪽이 외국 국적이면 상관없다. 이때는 자녀가 한국인이라도 외국인학교에 보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몰타나 키프로스, 도미니카연방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시민권을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6개월 안에 여권이 발급된다. 입학 신청을 얼마 앞두지 않은 부모 입장에선 효율적인 방법이다.

기자가 강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몰타 시민권을 딴 뒤 아이를 한국의 외국인학교에 보내려 한다”고 말했더니 이내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부모의 국적이 몰타처럼 흔치 않은 나라일 경우 당국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포르투갈을 추천했다. 현재 35만 유로(4억6000만원)짜리 펀드에 가입하면 선착순 100명까지 시민권을 주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강사는 “나중에 유럽연합 시민권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이주 알선업체 M사의 관계자는 “요즘 외국인학교 입학과 관련해 문의가 많이 온다”며 “빨리 신청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국인학교에 가보면 비슷한 국적을 가진 어머니들이 꽤 있을 테니 모임이라도 가지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고 했다.

외국인학교의 1년 학비는 2500만~3000만원 선이다. 일반 직장인 연봉에 버금가는 돈을 고스란히 쏟아 부어야 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상류층의 ‘검은 머리 외국인’들은 외국인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부산외국인학교(BFS)에 아들을 보내고 있는 이아무개씨(여·33)는 “외국인학교 학칙에 따라 정원의 30%가 내국인으로 채워지는데, 내국인 부모의 절반이 외국 국적의 한국인”이라고 했다. 이씨는 미국 시민권을 보유한 복수 국적자다.

외국인학교에선 100%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다. 그래서 해외 유학의 필수 코스로 간주되곤 한다. 주재원이나 재외공관 자녀들이 많아 글로벌 인맥을 쌓기에도 유리하다. 이씨는 “BFS 주변의 부산 마린시티는 소위 ‘외국인학교계의 대치동’으로 불린다”며 “이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괌에 원정출산을 가거나 해외 시민권을 따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미국인 윤아무개씨(여·33)는 “외국인학교가 한국에서 영어권 문화를 습득하기에 유리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외국인학교 입학 자격을 갖췄지만, 아이를 서울 한남동에 있는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한국에서 교육을 시키려는 등의 이유다. 윤씨는 “(해외 시민권 취득이) 대중적이지 않고 편법이라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 고려해 봄직한 방법”이라고 했다. 재벌가에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등이 자녀가 외국인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전후해 해외 영주권을 땄다.

서울교육청 학교지원과 관계자는 “제3국 국적 취득을 통한 외국인학교 입학을 편법으로 볼 순 있어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다”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이민 알선업체들도 편법을 언급하지만 불법 영업을 하는 건 아니다. 모두 현행법에 따라 외교부에 정식 등록돼 있기 때문이다. 7월말 외교부에 등록돼 영업 중인 알선업체는 총 110곳이다.

외교부는 “(이민 알선업체) 등록에는 해외이주법에 따른 최소한의 등록요건을 구비한 것 이상의 의미가 없으며 외교부가 업체의 영업활동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단 해외이주법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이주자를 모집하거나 알선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외교부 “모든 업체 영업사항 일일이 관리 못 해”

안영운 한국해외이주협회 회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5월24일 회원사에 부당광고에 대한 유의사항이 담긴 공문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관련 업체들 모두가 편법을 홍보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보냈다는 공문에는 “상속·증여상 조세 회피를 암시하는 듯한 용어의 사용 자제”라고 적혀 있었다. 해외이주협회는 외교부 산하 비영리법인으로 21개 이민 알선업체가 속해 있다.

이에 시사저널은 8월5일 21개 회원사의 홈페이지 및 블로그를 확인해 봤다. 그 결과 14곳이 해외이주의 장점으로 ‘세금 혜택’을 내세웠다. 이 가운데 두 곳은 ‘병역 면제’란 단어를 써서 홍보하기도 했다. 외교부 영사지원팀 관계자는 “모든 등록업체의 세부 영업사항을 일일이 관리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다만 “‘병역 회피’나 ‘절세’ 등 부적절한 단어로 홍보를 했다면 관리·감독의 필요가 있어 보인다”며 “제재 방안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7월 돈만 내면 여권을 쥐여주는 10개국을 소개했다. 오스트리아, 터키, 몰타, 키프로스, 도미니카, 바누아투, 그레나다, 세인트루시아, 앤티가바부다, 세인트키츠네비스 등이다. 법무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이들 국적을 취득한 내국인(통계에 없는 3개국 제외)은 △2016년 22명 △2017년 39명 △2018년 47명으로 해마다 늘었다. 법무부 관계자는 “국적 취득자가 취득 사실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거나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경우까지 합하면 실제 숫자는 통계치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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