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은 왜 일본인을 아프게 할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0 17: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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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한 일본 우익의 왜곡된 반응

일본에서 지난 8월4일 상징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아이치현이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라는 제목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일본판 검열에 걸린 전력이 있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관련 작품, 일본 천황제 비판 작품들과 함께였다. 이 전시는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라는 큰 전시의 한 부분이었는데, 일본 정·관계의 거센 항의와 압력으로 이 기획전 자체가 통으로 폐쇄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지배 세력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전시가 폐쇄되는 일은 독재체제에서나 경험하는 일이다. 일본 정치의 위기상황이 이 정도일까 하는 염려가 들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이 기획전시에는 모두 17개 작품이 포함되어 있지만, 역시 평화의 소녀상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심지어 소녀상 전시가 “일본인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고 주장했던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에서도 소녀상 철거가 합의 내용으로 제시되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철거하고, 세계를 향해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소녀상을 세우는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평화의 소녀상을 왜 그렇게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걸까.

ⓒ instagram 캡처
ⓒ instagram 캡처

‘소녀상 되기 운동’이 주는 메시지

원래 이 소녀상은 2011년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평화비를 세우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평화비를 직접 제작한 김서경·김운성 부부에 따르면, 처음에는 글자만 있는 비를 세우고자 했으나 차츰 할머니들을 직접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소녀의 형상으로 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녀상은 걸상에 앉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뒤꿈치를 불안하게 살짝 들어올린 치마저고리 차림의 단발머리 소녀, 소녀 옆의 빈 의자, 어깨의 비둘기, 소녀의 뒤로 바닥에 드리운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와 그림자의 가슴에 있는 흰 나비로 구성된 작품이다.

평화비가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을 때,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우에노 지즈코는 이를 비판하면서 “소녀는 위안부를 대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일본인 창녀 차별”이자 “반일민족주의”라고까지 했지만, 피해자들의 다수는 실제로 미성년자일 때 끌려갔다. 소녀상에는 그로써 소녀 시대를 빼앗긴 것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과 정·재계 유력 인사들이 소녀상을 두고 “일본인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과거에 저지른 범죄를 상기시키는 일이 치욕을 당하는 일에 해당한다는 전도된 인식을 바로잡으려면 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소녀상을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부정하고 왜곡하는 이들에 맞서서, 일단 만나보는 것.

소녀상 옆의 빈 의자에 앉아보거나, 앉은 소녀와 누운 할머니 형상 사이의 빈 공간에 서 보면 이 평화비가 환기하고 있는 메시지를 좀 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 아이치현 전시 폐쇄 사건 이후 세계 도처에서 ‘소녀상 되기 운동’이 펼쳐지는 것은 그 메시지의 적극적 표현이다. 이 슬픔과 연대하라, 그러면 알 수 있다. 누가 잘못했고 그 잘못이 무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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