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외면받는 중국 내 ‘임정의 흔적들’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2 15: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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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임시정부 청사 ‘유적화 작업’ 지지부진…류저우진열관은 개방 중단돼

7월29일,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 위치한 쉬구위안루(恤孤院路) 12호. 작은 쪽문을 거쳐 오래된 두 건물의 정원 안으로 들어가자, 쪽문 옆에 ‘광저우역사건축’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정원 안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 두 채가 우뚝 서 있었다. 두 건물은 한눈에 봐도 20세기 전반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연륜을 지닌 대리석 기둥으로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오른쪽 건물의 문으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마침 희미한 백열등 아래의 어두운 복도에서 70대의 노파가 걸어 나왔다.

필자가 신분을 밝히고 건물의 연혁에 대해 물었다. 그는 “1920년대에 지어져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노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두 건물은 1923년부터 1926년 사이에 지어진 바이위안(栢園)이다. 바이위안은 완공된 뒤 국민당 정부의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한동안 사용했다. 그 뒤 이런저런 관청의 건물로 활용되다가, 1938년 7월에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피난에 나선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이 광저우로 이주하면서, 두 달 동안 이곳 바이위안에 머물게 됐던 것이다.

100년 가까운 역사의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 ⓒ 모종혁 제공
100년 가까운 역사의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 ⓒ 모종혁 제공

바이위안 청사, 소유권 문제로 유적화 난항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이후 일본은 임정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따라서 임정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저장성과 장쑤성으로 피신했다. 이 기간 동안 김구 주석은 여러 차례 일제 밀정의 암살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다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임정이 국민당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정 요인들과 가족은 1937년 11월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장쑤성 전장에서 후난성 창사(長沙)로 이동했다. 창사에서는 이듬해 6월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전황이 긴박해지자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한 달여 동안의 여정을 거쳐 광저우에 도착했던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저 출발하여 광저우에 도착하였다. 이전부터 중국 군사 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식, 채원개 두 사람의 주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 청사로 하고, 아세아 여관에 대가족 전부를 수용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동산백원이 바로 바이위안이다. 국민당 정부는 바이위안을 관청 건물로 줄곧 사용했기에, 임정을 위해 곧바로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런 조치는 임정을 위한 중국의 세심한 배려였다. 당시 바이위안이 있는 쉬구위안루 일대에는 1920년부터 돈 많은 화교들의 주택과 별장이 세워졌었다. 또한 광저우의 시 중심지와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했다. 실제 어린 나이에 피난길을 함께했던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회고록에 다음처럼 기록했다. “(쉬구위안루 일대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 특히 외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별장이 많은 곳이었다. 거리도 깨끗하고 골목도 포장돼 있어 그때까지 보아온 중국의 다른 거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임정은 (중략) 바이위안이라는 별장을 세내어 사무실로 썼다.”

과거 우리 학계에서는 동산백원이 폭격을 맞아 사라졌다고 여겼다. 따라서 2013년부터 광저우총영사관은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동산백원 터를 찾아 기념비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다가 2015년 《타이베이대학역사학보》에서 중앙연구원의 연혁을 정리한 논문을 발견했다. 해당 논문을 통해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개소한 뒤 바이위안을 사용했고, 그 주소는 쉬구위안허우제(後街) 35호임을 알아냈다. 하지만 쉬구위안허우제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측량됐던 지도와 각종 문헌을 확인해 지금의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2016년 8월 독립기념관은 현지에서 검증 작업을 진행했다. 이듬해 2월 우리 외교부는 바이위안이 광저우에서 임정이 사용했던 청사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바이위안에서 그 어떤 유적화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광저우총영사관 측은 “당초 중국 측에서 바이위안에 임정 유적지였다는 내용의 표지석을 세우겠다고 통보했었으나, 사드 배치 문제로 한·중 갈등이 깊어지면서 유야무야됐다”고 밝혔다. 그 뒤에도 우리 정부는 바이위안에 기념비를 세우는 문제 등 여러 방안을 중국 당국과 협의했으나, 바이위안의 소유권 문제로 별다른 진척이 없는 상태다.

중국 류저우에 있는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진열관 ⓒ 모종혁 제공
중국 류저우에 있는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진열관 ⓒ 모종혁 제공

류저우진열관, 찾는 이 없어 관리 부실

그런데 이번에 바이위안과 그 주변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점도 발견됐다. 바이위안과 직선거리로 불과 70m 거리에 중국공산당 3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은 1923년 6월 당대회가 열렸던 곳을 복원해 지었다. 중국에서 공산당 관련 역사유적은 혁명성지로 특별 보존·관리된다. 따라서 2006년에 기념관을 새로 지었지만, 광둥성중점문물로 지정되어 성역화돼 있다. 또한 기념관 주변의 여러 건축물도 당대회 당시 공산당원들이 묵었거나 회합을 가진 유적지로 지정되었다. 즉, 바이위안이 공산당 혁명성지와 맞붙어 있는 격이다.

이런 현실에서 국민당 정부의 관청으로 쓰였고, 국민당의 도움 아래 청사를 빌려 썼던 임정의 처지가 현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국민당 정부는 지금의 대만 정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 내 복수의 역사학 교수에게 질의하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혁명성지 코앞에 국민당과 연관된 외국 정부의 건물을 유적화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과거의 인연은 절대 강조하지 말고 향후 한·중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앞세워라”고 조언했다.

이처럼 임정 수립 100주년에 아직 유적화가 안 된 곳도 있지만, 거꾸로 유적화가 됐으면서도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곳도 있다. 광시자치구 류저우(柳州)진열관이 대표적이다. 1938년 9월 광저우를 떠난 임정 요인들과 가족은 한 달여 뒤에 류저우에 도착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임정 요인들은 ‘강북 탄중루 50호에 있는 3층 양옥집’에 수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는 피난길을 함께했던 이들에게도 확인된 사안이다. 그런데 2001년에 류저우 시정부가 먼저 각종 자료를 들고 한국을 찾아와 러췬서(樂群社)에서 임정 요인들이 묵었다고 주장했다.

러췬서는 1920년대 러시아가 세운 건축물이다. 처음에는 버스터미널로 쓰였다가 1935년부터 호텔로 사용됐다. 따라서 임정 요인들이 묵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한 자료가 없어 지금까지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2004년 류저우 시정부가 러췬서를 임정항일투쟁활동진열관으로 조성해 개관했다. 또한 2006년에는 러췬서가 전국중점문물로 지정됐다. 필자는 과거 류저우진열관을 3차례 방문했는데, 완벽한 보존 상태에 놀라곤 했다. 하지만 류저우를 찾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기에 관리가 점점 부실해졌다. 올해 들어서는 아예 대외개방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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