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전쟁 ‘패러독스 관리’가 절실하다
  • 양향자 前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0 10:00
  • 호수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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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은 있어도 못 할 일은 없다”는 반도체人 신조 곱씹어야
양향자 前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
양향자 前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

대한민국 반도체는 그야말로 ‘패러독스(paradox·모순)의 역사’였다. 용량(density)이 늘어나는데도 크기(area)는 줄여야 하고, 속도(speed)가 빨라지는데도 전력(current) 소모는 줄여야 하고, 성능(performance)이 좋아지는데도 가격(cost)은 줄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개발기간은 획기적으로 단축해야 한다.

전쟁과도 같은 글로벌 경쟁 시장에서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미국을 넘어, 일본을 이긴 반도체의 성공신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분명한 것은 ‘반도체인의 DNA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위기가 반도체 패권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판이 새로 짜이고 퀀텀 점프의 기회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역사도 바로잡아야 하고, 경제문제도 풀어야 하는, 저글링과도 같은 패러독스 관리가 절실한 지금이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술력은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격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됐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세계를 지배한 분야는 선례를 찾기 어렵다고 감히 생각한다.

반도체인의 역발상…‘초격차’ 만든 힘

대한민국이 ‘반도체 패권’을 거머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기술 패권이 없는 국가는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이 바로 해양기술, 증기기관 같은 당대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국가였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기술 패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가 바로 반도체다. 단군 이래 최고의 기술 패권을 거머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서는 정작 반도체의 성공 요인에는 관심이 적은 듯하다. 어떤 노력이, 어떤 힘이 우리의 반도체를 세계시장의 70%를 거머쥐는 제품으로 탄생시켰는지 말이다. 나는 반도체 성공 스토리를 뜯어보면 그 안에서 대한민국을 초일류 국가로 만들 비법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31년간 삼성전자라는,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에서 일하며 나는 무척이나 많은 것을 배웠지만, 내게 반도체 성공 요인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모순 관리(Paradox Management)’라고 답하고 싶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력은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격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됐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세계를 지배한 분야는 선례를 찾기 힘들다. ⓒEPA연합
한국의 반도체 기술력은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격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됐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세계를 지배한 분야는 선례를 찾기 힘들다. ⓒEPA연합

 

반도체는 전 세대 대비 더 작은 크기 안에, 더 많이 저장하는 기능을 담으면서 전력 소비는 덜 하고, 가격은 오히려 싸지는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일반 제품과 무척 다르다. 좋을수록 비싼 제품이 아니라, 좋은데 싼 제품을 만드는 지독한 역설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래야 경쟁자들을 이기고 투자의 성과물, 개발 과정의 노고를 크게 보상받을 수 있는 품목이다.

반도체인들은 이런 모순을 역발상으로 풀어간다. 단가를 10% 줄이자는 목표가 생기면, 아예 10%로 만들 수는 없을까를 생각한다. 그 순간 익숙했던 모든 것과 결별하고 완전히 새롭게 일을 시작해야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인들이 그런 역설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동안 미국, 대만, 일본의 경쟁자들이 차례로 쓰러졌고 ‘초격차’를 실현했다. ‘초격차’의 ‘격’이 거리의 ‘격’이 아니라 품격의 ‘격’인 것이다. 기술의 격은 바로 기술자의 품격이다.

우리가 메모리 반도체의 기술 수준을 발전시켜갈수록 일본은 소재에 특화할 수밖에 없었다. 노벨 과학상을 20여 개나 받을 정도로 기초과학이 탄탄한 일본은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소재’에 특화했고, 대한민국 기업들은 정밀한 회로도를 그려내고 싼값에 대량으로 만들어내면서 ‘생산’ 역할을 담당했다. 소프트웨어 기술이 발달하고 첨단기기를 가장 많이 만드는 미국은 이 반도체의 ‘소비’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게 글로벌 분업이 정착되면서 일본의 소재와 한국의 반도체는 함께 발전했다. 이제는 ‘글로벌 가치 사슬’을 넘어‘글로벌 가치 서클’이 됐다.

반도체가 역사·정치 갈등 희생물 돼선 안 돼

최근 한국 주재 일본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한 일본 기자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왜 소재 국산화를 못 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질문은 반대로 ‘왜 일본은 최고의 소재를 갖고도 반도체 생산을 국산화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과 똑같다”고 답했다. 전 세계는 각자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문명을 일으켜왔다.

지난 7월4일 일본이 반도체 소재 세 가지를 수출규제 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불과 3년 전까지 현장에서 반도체 설계·감수(Integration & Verification Group)를 맡았던 개발자로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세 가지 품목이 비메모리라는, 삼성의 미래 먹거리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실무자로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정교하게 준비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도체가 역사적·정치적 갈등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소재-생산-소비라는 글로벌 동맹체제, 분업과 협업으로 인류 문명을 함께 발전시킨다는 묵시적 룰을 깨는 일은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해법은 뭘까. 이 역시 ‘모순 관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문제다. 그러면서도 반도체는 더욱 번영해야 한다. 역사적 문제와 산업적 문제를 두고 어느 한쪽만을 택할 수 없는 상황, 역사는 역사 문제대로 풀어야 하고 반도체는 반도체대로 번영시켜야 한다는 모순적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모순 관리를 위해 우선 외교적 역량 발휘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외교 문제가 경제 분야나 기업 쪽으로 옮겨붙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수입처 다변화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서 중장기적으로는 중소기업과 손잡고 소재 국산화에 나서야 한다.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첨단 소재를 하나하나 국산화할 수 있도록 과학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흩어져 있는 국가 R&D(연구개발) 역량도 하나의 컨트롤타워 아래서 일사불란하게 추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국내 4년제 대학교의 50%에 물리학과가 없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안정된 직업을 찾아 공무원으로 몰리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일본의 이번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는 몰상식한 조치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대기업이 악(惡)이 아니라 기술 패권을 지닌,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반도체인들에게는 ‘반도체인의 신조’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다. 이번 반도체 소재 문제도 어려운 일이지만 해결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모순 관리에 성공해 위기의 시간을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먼 훗날 2019년을 돌아봤을 때, 대한민국의 기술 패권, 반도체 패권이 한 단계 더 도약한 시발점이 된 해로 기억되길 희망한다. 어려운 일은 있어도 못 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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