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계 뒤흔든 反日 열풍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4 13:00
  • 호수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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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과도한 열기 냉각시킨 대중…일본 반대에서 아베 반대로 표적 정교화

‘경제왜란’으로 불리는 일본의 경제공격으로 한국 누리꾼들이 격분했고 유례없는 반일 불매운동이 펼쳐졌다. 대중문화계에선 먼저 여행 프로그램에서 일본이 퇴출됐다. 이미 경제공격 이전부터 우리 방송사들이 일본을 소개하는 것에 반발 조짐이 있었다. 여행 예능 전성기인데 여행지로 일본을 선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본의 대도시, 유명 관광지를 재탕 삼탕으로 샅샅이 훑고 나중엔 이름 없는 지방 소도시까지 하나하나 소개했다. 우리 방송사가 일본 관광산업 홍보에 나선 것과 마찬가지여서 경계심이 일던 차에 일본이 경제공격에 나선 것이다. 불매운동으로 특히 일본 관광을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그래서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본 촬영이 전면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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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적인 일본 지우기

일본계 연예인들이 공분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트와이스의 사나·모모·미나, 아이즈원의 미야와키 사쿠라·혼다 히토미·야부키 나코 등에 퇴출 압박이 가해진 것이다. “일본 연예인을 소비하는 것은 일상에 스며든 일본 문화를 경각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다”는 논리였다. 김의성이 “아베가 날뛰는데 왜 사나를 퇴출시키나. 사나는 건드리지 마라”고 SNS에 써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일본 지우기는 전방위적으로 퍼져갔다. 장기용은 일본 팬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 일정을 알리지 않고 8월2일 조용히 출국했다. 하지만 결국 출국 모습이 포착돼 비난을 받았다. 장기용 측은 5개월 전에 잡힌 일정이라 취소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이 사건을 전하며 한 매체는 “당분간 다른 배우들의 일본 팬미팅 개최 소식을 접하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썼다.

EBS는 ‘세계의 명화’ 시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편성했다가 방영 직전 《석양의 건맨》으로 대체했다. 방송사 측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작품성이 검증된 영화지만, 일본 보이콧 분위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체했다”고 설명했다. OCN, 채널CGV 등 영화 채널도 일본 영화 편성 자제 방침을 밝혔다. 극장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코난》은 흥행 성적이 저조했고, 《도라에몽》은 개봉 자체를 연기했다. 영화제에도 영향이 미쳤다.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는 일본 검객 영화 《자토이치》를 모티브로 한 영화제 공식 포스터를 교체하고, 《자토이치 오리지널 시리즈 섹션》도 취소했다. 항일 영화인 《봉오동 전투》는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가요계에선 윤종신이 《프로듀스48》에 출연한 다케우치 미유와 함께 신곡을 발표하려 했다가 발매를 연기했다. 2019 미스코리아 진선미 7인은 올 10월 일본에서 열리는 ‘미스 인터내셔널’에 불참할 것을 결의했다. 미스코리아 전원이 외국 미인대회 보이콧을 결의한 것은 1957년 미스코리아 출범 이후 최초다. 미스코리아 운영본부는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전 국민이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극일로 하나 되는 시기에 일본 주최 국제대회 참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만장일치로 불참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운동계에선 강릉시가 한·중·일 여자 컬링 친선대회에 일본팀을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컬링팀이 일본에서 열린 컬링대회 출전을 취소하기도 했다. 한국여자농구연맹은 박신자컵 서머리그에 일본팀 초청을 철회했다. 남자 프로농구에선 10개 구단 가운데 7개 구단이 일본 전지훈련을 계획했으나 7개 구단 모두 취소했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연예인들도 잇따랐다. 이시영은 일본 운동용품을 국산으로 교체해 인증사진을 올렸고, 오정태는 120만원 손해를 보며 부모님 일본 효도여행 계약을 취소했다. 옥주현은 위안부 피해자 다큐멘터리 《김복동》 관람운동을 펼쳤다. 유병재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복지시설에 1000만원을 기부했고, 송혜교는 중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한글 안내서 1만 부를 기증했다. 전효성은 SNS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는 글을 올렸다가 일본 누리꾼의 비난을 받았다.

특히 한류 스타인 전효성과 송혜교의 거침없는 행보가 놀랍다. 과거엔 일본 시장의 눈치를 보느라 과거사 문제에 소극적인 연예인들이 많았지만 올여름 일본의 경제공격으로 인한 국민 공분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참하는 모양새다. 정유미는 혐한방송 논란을 빚은 일본 DHC 화장품과의 모델 계약을 위약금을 감수하고 파기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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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의 자정작용은 긍정적

한편으론 집단지성의 작동으로 자정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걸그룹 로켓펀치의 쇼케이스 때 한국 기자가 일본 멤버 다카하시 쥬리에게 한·일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을 하자 사회자가 답을 막았다. 한 매체는 사회자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런데 누리꾼들이 난처한 질문을 한 기자를 비난하며 다카하시 쥬리의 한국 활동을 응원했다. 대중문화에 정치적 문제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인 퇴출을 외쳤던 사태 초기와 달라진 모습이다. 서울 중구청이 일본 보이콧 깃발을 내건 것도 누리꾼 반발로 철회됐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애국주의 선동에 매우 취약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애국주의, 민족주의 여론이 나타날 때마다 지식인들이 대중의 열기를 식히려 했다가 ‘꼰대의 훈장질’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엔 대중이 스스로 열기를 냉각시킨 것이다. 누리꾼들은 일본 반대에서 아베 반대로 표적을 정교화하며, 일본의 일반 시민과 연대하고 문화 교류는 이어가자고 했다.

우리 지도층은 이런 대중의 수준에 못 미친다. 제천시의회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일본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가 누리꾼들의 빈축을 샀다. 영화제 측이 시의회의 요구를 묵살하자 지지가 이어졌다. 일본 칸영화제 수상작 방영을 취소하거나 운동경기에 일본팀 초청을 취소한 것도 과도한 일이었다. 일본 제품에 상업적 이익을 안겨줄 필요는 없지만, 영화제 수상작을 통한 예술 교류나 운동경기 교류 같은 것은 이어져야 한다. 미스코리아들이 일본 미인대회를 거부한 것은 그 대회에 참가할 경우 일본 홍보에도 참여해야 하는 조건 때문인데, 이런 특수성이 없는 한 일반적 교류는 이어가야 한다.

초기에 일본 활동 자체를 비난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 누리꾼들은 일본 활동을 위해 출국하는 연예인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파급력이 약하고 지속성이 떨어졌던 과거와 다른 뜨거운 불매운동이 대중문화계를 흔들었고, 뒤이어 나타난 집단지성의 자정작용이 또다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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