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일항쟁기 고단한 인력거꾼이 희희낙락 볼거리로
  • 인천취재본부 이정용 기자 (teemo@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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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청 ‘기념 사진용 관광시설물’…일본 권력기관 앞 설치
“뼈 아픈 역사를 가진 소재…교훈 없이 상업적 목적 활용 안 돼”

지난 8월19일 오후 1시쯤 인천 중구청사 앞. 청동으로 만든 인력거꾼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마엔 헝겊을 질끈 동여맸고, 남루해 보이는 윗저고리를 걸쳤다. 목선 부위의 옷깃에는 ‘人間の力(인간의 힘)’이라는 일본어가 새겨져 있다. 신발은 일본의 전통 버선 ‘타비’와 비슷한 모양이다.

그는 오른쪽 무릎을 꿇은 반 무릎 자세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 참이 지났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일항쟁기에도 고단하게 살았는데, 여전히 고단한 모습이다.  

인천 중구청사 앞에 설치된 인력거꾼 조형물을 바라보는 일본인 다나카씨. ⓒ이정용 기자
인천 중구청사 앞에 설치된 인력거꾼 조형물을 바라보는 일본인 다나카씨. ⓒ이정용 기자

이따금씩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인력거에 올라타 사진을 찍기도 한다. 즐거운 표정이다. 하지만, 일본인 관광객 다나카씨(58)는 미간을 찡그렸다.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게 못마땅하다는 얼굴이다. 그는 자신을 ‘일본 오사카지역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설명했다.

다나카씨는 “인력거꾼 조형물은 식민지 시대의 애달픈 역사를 갖고 있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인력거에 올라타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옛 통감부 이사청 자리 앞에 인력거꾼 조형물이 설치된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인력거꾼 조형물, 식민지 권력기관 이사청 터 앞에 설치

인력거꾼 조형물이 설치된 곳의 바로 앞은 인천시 중구 관동1가 9번지다. 지금은 인천시 중구청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인천시 중구청사는 대일항쟁기 일본과 인연이 깊다. 일본은 1883년 10월31일 이곳에 2층짜리 목조 건축물로 영사관을 지었다. 영사관에는 경찰서와 소방서, 재판소, 우편국 등이 설치됐다. 당시 일본조계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고, 일본인들의 민원을 처리했다.

이 영사관은 1906년 2월1일 이사청으로 개청됐다. 일본이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던 통감부의 직속 산하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식민통치를 준비하는 기구였다. 인천도시역사관 우석훈 학예사는 “이사청은 일본의 식민지 권력을 상징하는 기관”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인천시 중구청사 주변은 ‘왜관’으로 불렸던 일본조계지였다.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인천시 중구는 2005년부터 일본조계지의 건축물들을 일본식 근대 목조건축물 양식으로 재현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또 2014년 6월에 1953만원을 들여 인력거꾼 조형물을 설치했다. 인천 중구청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즐거운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관광시설물”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식민지 권력을 상징하는 이사청 터 앞에 조선인들의 고단한 삶이 서려있는 인력거꾼 조형물이 즐거운 사진찍기용 관광시설물로 설치된 셈이다. 이는 2011년 12월14일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시 종로구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처음 세운 것과 대조적이다.

 

인력거꾼 조형물 설치 배경에 대한 인천 중구청의 설명 내용. ⓒ이정용 기자
인력거꾼 조형물 설치 배경에 대한 인천 중구청의 설명 내용. ⓒ이정용 기자

“역사적인 메시지 전달 고려해야…관광용 소재 활용 안 돼”

최근 ‘반일’이나 ‘극일’운동이 벌어지면서 인력거꾼 조형물에 대한 평가가 재조명되고 있다. 대일항쟁기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인력거꾼의 모습이 ‘즐거운 사진찍기용’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력거꾼은 대일항쟁기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을 표현하는 문학예술 장르에 종종 등장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이 대표적인 사례다. 소설에 등장하는 김 첨지는 식민지 조선에서 인력거를 끌며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는 서민이다. 

특히 인력거는 일본인 소유였지만, 조선인들이 끌었다. 인력거꾼들은 일본인 인력거 회사에서 인력거를 운행해 벌어들인 수입을 회사와 나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차주의 일방적인 임금인하와 민족차별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일항쟁기 군산지역 인력거꾼들을 일본인 인력거 차주들의 횡포에 대응할 목적으로 ‘군산인력거연합친목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1919년에 3·1만세운동이 벌어진 후 ‘인력거 차부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력거꾼 조형물 설치 배경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인력거꾼 조형물을 설치하기 전에 역사적인 메시지 전달을 고려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승한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상식적으로 인력거꾼 조형물 설치에 대한 정당성이나 타당성이 제대로 검토됐는지 의문이다”며 “조선인 인력거꾼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누구를 태웠고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 고민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력거꾼 조형물은 단순한 과거의 향수나 낯선 이국적 호기심을 자극해 관광객을 끌기 위한 상업적 목적이 강해 보인다”며 “과거 조선인의 뼈 아픈 역사가 즐거운 관광용 소재로 활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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