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공포에 떨게 한 한낮의 미스터리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17 08:00
  • 호수 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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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인의 사건추적] 2016년 완도 아령 살인 사건

전남 완도군 금일읍에 있는 ‘평일도’는 완도에서 배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다. 한 번도 외침을 받은 적이 없는 평화로운 섬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대미문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16년 5월16일 평일도 사동리의 한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화투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날 마을회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김아무개씨(80)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 단짝으로 어울리던 노인들 중 한 명이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으나 김씨는 받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넘자 이들은 김씨의 집에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친척 변아무개씨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형님, 안에 있소”라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닫힌 현관문을 열었더니 안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변씨는 “형님” 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이때 예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코끝을 자극했고, 누워 있던 김씨 주변이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변씨는 기겁하며 그대로 뛰쳐나왔다. 변씨가 놀라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뒤따라오던 신아무개씨가 도착했다.

신씨는 방 안으로 들어가 김씨의 시신을 마주했으나 ‘타살’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김씨가 평소 폐가 좋지 않아 종종 각혈을 했기 때문에 ‘병사’로 생각했다. 그는 사후경직으로 굳어가던 김씨의 손과 다리, 어깨를 펴서 바로 눕혔다. 약 1시간 후 소식을 들은 김씨 가족들이 속속 찾아왔다. 이들은 김씨의 몸에 병사로 볼 수 없는 상처들이 보이자 경찰에 신고했다. 평일도를 공포와 충격에 빠트린 살인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 일러스트 오상민
ⓒ 일러스트 오상민

안방에서 발견된 참혹한 시신

경찰이 출동해 보니 현장은 참혹했다. 방바닥과 이불에 피가 흥건하게 묻었고, 벽에도 혈흔이 튀어 있었다. 김씨의 머리에는 둔기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입 주위에 다른 흉기에 가격당한 흔적이 보였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시신의 부검을 의뢰했다. 얼마 후 국과수는 ‘고도의 두부 손상’이라는 소견을 내놨다. 머리 쪽에서 둔기에 맞은 상처가 12곳이나 발견됐고, 분쇄골절까지 일으켰다. 누군가 둔기로 김씨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내려쳤다는 뜻이다.

머리 앞쪽과 뒤쪽에 있는 상처의 모양과 크기가 달라 사용된 둔기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입술에는 상처뿐 아니라 흉기에 의해 생긴 천공(구멍)이 있었다. 머리에 사용된 둔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법의학자들도 입술에 난 상처는 둔기에 의해 생길 수 없다는 소견을 밝혔다. 이를 근거로 보면 범인은 최소 3가지 이상의 둔기나 흉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됐다. 일반적인 타살 시신에서 흔히 발견되는 방어흔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김씨가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시에 공격당한 것을 의미한다.

김씨는 왜 범인에게 제대로 대항 한 번 못 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경찰은 당시 김씨가 복용하고 있던 약에서 답을 찾았다. 김씨는 대상포진 등으로 여러 가지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었다. 그가 받은 약에는 졸음과 어지럼을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김씨는 사건 당시 졸리거나 나른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잠이 들거나 한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공격받아 방어흔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현장 정밀감식을 통해 범인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김씨의 시신 주변에서는 피 묻은 아령이 발견됐다. 마을회관에 있던 것을 운동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머리의 상처 일부와 아령의 모양이 같은 것을 볼 때 범행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감식에 나선 경찰을 의아하게 한 것은 방 안 풍경이었다. 시신의 다발성 상처와 혈흔이 낭자한 현장에 비해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범인이 현장을 정리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경찰은 현장에서 머리카락 등 240여 가지를 수거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으나 제3자의 것은 나오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살해 도구인 아령에서도 범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은 김씨가 스스로 자해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 마을에서도 김씨가 평소 대상포진으로 극심한 통증을 여러 차례 호소한 적이 있어 자해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상처와 현장 혈흔 분석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로 결론이 났다.

혈흔으로 봤을 때 김씨가 처음 공격받은 지점은 방문 앞이었다. 범인은 벽 쪽으로 쓰러진 김씨의 이마를 집중 공격했다. 이어 기어가는 자세로 움직이던 김씨를 창문 바로 앞에서 마지막으로 공격했다. 결국 김씨는 여기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둔 것으로 판단됐다. 평일도 토박이인 김씨는 10여 년 전 아내와 사별한 후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마을 이장을 역임하는 등 주민들의 평판도 좋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씨에 대해 하나같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원한 살 일도 없다”고 말했다.

미역공장을 운영하면서 경제적 형편도 넉넉했지만 부도가 난 후에는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누군가 돈 때문에 김씨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마을에는 100여 가구가 거주했다. 섬의 특성상 한 집 건너 사돈의 팔촌으로 주민들은 친인척 관계로 연결돼 있었다. 경찰은 마을 주민 전부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당일 행적과 알리바이 등을 집중 조사했다. 상당수의 주민이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됐다. 그러다 한 명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다.

김씨 집에서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이웃주민 A씨(70)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진술을 번복하는가 하면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거부했다. A씨는 사건 당일 “김씨와 통화한 적도 없다”고 했으나 김씨의 통화내역에서 A씨와 통화한 기록이 나왔다.

김씨는 이날 숨지기 전 한 사람과 세 번 통화했는데 그가 바로 A씨였다. 경찰이 통화내역을 들이대자 A씨는 “김씨가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걸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것도 사실과 달랐다. 김씨는 마지막 통화 직전에 A씨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1분19초 동안 통화를 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아령과 김씨의 시신이 발견된 안방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캡처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아령과 김씨의 시신이 발견된 안방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캡처

수상한 마을 주민 A씨

A씨는 김씨와의 통화 내용에 대해서는 “‘호박모가 있으니 가져가라’고 해서 낮 12시가 조금 넘어 김씨 집에 갔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호박모 3개 중 2개만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A씨가 진술한 사건 당일 행적도 맞지 않았다. 그는 “고추밭에 농약 주고 손자와 놀아줬다”고 했으나 이것 또한 거짓으로 드러났다. A씨는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을 때마다 본인 주장은 강하게 하면서도 진술이 맞지 않으면 “화장실이 급하다”는 식으로 진술을 회피했다고 한다.

경찰은 A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하고 긴급체포해 추가 조사를 벌였다. A씨는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하며 자신은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A씨의 신병을 확보했으나 범행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범행 동기도 파악하지 못했다.

실제 A씨의 집에서는 그가 김씨 집에서 가져왔다는 호박모가 발견되기도 했다. 결국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피의자로 입건하지 못하고 석방했다. 유력한 용의자가 풀려나면서 경찰 수사도 답보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2017년 4월2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루면서 A씨와 접촉했다. 그는 이때 “나는 많이 아프고 약도 많이 먹는다.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은 게 너무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건 당시 마을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는 단 한 곳뿐이었다. 피해자인 김씨 집을 멀리서 비추고 있었고, 범행 당일 희미하게 움직이는 물체가 포착됐으나 사건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찰은 수사가 장기화되자 신고포상금 500만원을 내걸고 전단지를 제작해 뿌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했다. 

범인이 남긴 단서들

1. 계획적인 살인이다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시신의 상처 등으로 볼 때 3가지 정도다. 이 중 집 안에 있던 아령을 제외한 2개는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이 들고 왔다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범인이 집 안에 있던 아령만을 범행 도구로 사용했다면 우발적 살인에 가깝다. 반면, 처음부터 흉기를 들고 침입한 것은 살인을 염두에 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피해자 집 안의 상황을 봐도 ‘살인’에 무게가 실린다. 김씨의 지갑에는 현금 40만원이 있었으나 범인은 그대로 두고 나갔다. 금품이 목적이었다면 집 안을 뒤졌어야 하는데 다른 물건에 손댄 흔적이 없었다.

2. 범인은 면식범이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평일도에서도 외진 마을이다. 배에서 내려 차를 타고 다시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한다. 한두 집 건너 사돈의 팔촌으로 연결돼 있다. 서로 집안 내력까지 훤하게 알고 있을 정도다.

사건 현장 어디에도 범인의 흔적이 없는 것은 그가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범인은 김씨가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그래서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라면 굳이 신발을 벗을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다. 시신의 상처와 방 안에 흥건했던 혈흔으로 볼 때 범인의 옷에도 분명 적지 않은 피가 묻었다. 하지만 섬에서 피 묻은 옷을 입은 낯선 사람을 본 목격자가 없다. 범인이 범행 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면 재빨리 숨을 곳은 자기 집밖에 없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범인은 김씨와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

3. 범인은 섬 안에 있다

청정 해역인 평일도 앞바다는 국내 다시마의 70%가 생산되고 있는 전국 최대의 다시마 생산지다. 5월은 한창 다시마를 수확해 건조하는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섬에서는 부족한 일손을 외국인 노동자들로 채웠다. 많을 때는 수백 명이 섬에 들어왔다.

경찰은 외국인 노동자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벌였다. 당시 사동리에 있던 외국인 4명에 대해 수사를 벌였지만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김씨를 죽인 것은 섬사람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사건 이후 섬을 빠져나간 주민이 없는 것을 볼 때 범인은 지금도 섬에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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