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독일처럼…” 시민사회 자성론 애써 외면하는 日
  • 류애림 일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10 11:00
  • 호수 156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라야마 담화' 계승 목소리 점차 확산…"망각이 비참한 역사 불러와"

9월1일 독일 대통령은 폴란드를 찾아 사죄했다. 80년 전 이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독일어와 폴란드어로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세계 언론이 주요 뉴스로 보도했지만, 일본 언론에서는 이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의 경우, 다른 관련 뉴스를 보도하면서 사죄 관련 내용은 본문 중 한 단락 정도로 짧게 요약해 정리했을 뿐이다. NHK방송에서도 홈페이지에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부터 80년, 독일 대통령이 사죄’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지만 영상으로는 보도하지 않았다.

“무라야마 담화, 간 총리 담화에 기초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야말로 한·일, 북·일 관계를 지속 발전시키는 열쇠다.” 지난 2월6일 일본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발표된 ‘일본 시민·지식인 성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발표한 이 성명에 226명이 서명했다. 이 성명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諸國)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음’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담화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해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것이다.

9월1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 중부 비엘룬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 AP 연합
9월1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 중부 비엘룬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 AP 연합

日 지식인 “아베, 한·일 반목 행위 중단하라”

또 2010년 8월에 발표한 담화에서 간 나오토 당시 총리는 ‘3·1 독립운동의 격렬한 저항’을 통해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들의 뜻에 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뜻을 표명합니다.”

‘2019년 일본 시민·지식인 성명’에서는 위의 두 담화에서 언급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상호 이해와 상호 부조(扶助)의 길로 나아가길 촉구했다. 이를 위해 위안부 문제는 물론 강제징용 문제에 일본 정부가 진지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시민과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를 시작했고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그리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8월15일 전몰자 추도식 행사에서도 ‘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 등 성명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지식인들은 7월25일 ‘한국은 적(敵)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8월31일에는 일본 도쿄 지요다구의 한국YMCA에서 ‘한국이 적인가-긴급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350여 명이 참여했다.

이 성명에서는 악순환에 빠진 한·일 관계를 쌍방의 냉정한 자기비판 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립과 분쟁에는 항상 쌍방의 문제가 있으나 일본의 시민인 자신들은 일본 정부의 문제만을 지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한일기본조약, 한일청구권협정을 존중해야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아베 정권의 주장처럼 ‘이미 해결’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일본 정부에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즉각 철회하고 한국 정부와 대화하길 요구하며 ‘아베 총리는 일본과 한국 사이를 가르고 양 국민을 대립, 반목하게 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호소한다.

이 성명과 서명운동 역시 일본 언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아사히신문도 8월17일자 사설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31일을 기준으로 9463명이 온라인을 통해 성명에 찬동해 서명에 참여했다. 이 중에서 6450명은 이름을 공개했으며 전국 각지의 일본인들이 서명에 참가하고 있다. 서명과 함께 간단한 의견을 투고할 수도 있는데 9월4일 기준 4085건이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관해 일본과 한국은 공통의 가치관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일본인 모두가 74년여 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겸허한 반성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의 장래 발전은 바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피해를 입은 나라가 반성과 사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일본 정부는 언제까지 사죄와 반성을 반복해야 하느냐고 반론합니다. 상대방이 더 이상 사죄는 필요없다, 일본은 더 이상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가 성의 있는 태도이며, 일반 상식입니다” 등의 의견이 있다.

8월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 EPA 연합
8월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 EPA 연합

간토대지진 학살에 대한 반성 촉구도

1923년 9월1일 일본에서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했다. 잘 알려져 있듯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수많은 조선인들과 중국인이 자경단을 비롯한 경찰,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매년 이날 일본 시민단체들의 주도 아래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도식이 열린다. 이 공원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는 “6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소중한 생명을 빼앗겼다”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우호와 평화의 길을 닦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은 “역사를 기록하고 이야기해 전하는 것으로 민족 차별과는 무연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추도식에 보내왔다. 반면에 고이케 유리코 현 도쿄도지사는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전임 도쿄도지사들은 재임 중 매년 추도문을 보냈으나 고이케 지사는 재임 첫해인 2016년을 제외하고 3년 연속 추도문을 보내고 않고 있다. 같은 공원 안에서 열리는 간토대지진의 전체 희생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요에 추도문을 보내기 때문에 조선인 추도식에는 따로 보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고이케 지사가 조선인 희생자 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추도문 보내기를 거부한 고이케 지사에게 항의하기 위해 8월22일 시민단체들은 도쿄 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미야카와 야스히코 추도식 실행위원장은 “과거의 과오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란다”고 호소하며 “풍화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망각이야말로 비참한 역사를 불러온다”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