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지위 상실한 우리 농업은 경쟁력 있을까
  •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6 08:00
  • 호수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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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불이’ 말고 경쟁력 필요한 시점…농민·농업·농촌 분리 접근해야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대표단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농업 부문과 관련해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할 때다. 우리 측 관계자가 이런 발언을 할 때마다 회의장에서는 야유가 쏟아진다. 누가 봐도 한국은 선진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농업 보호를 위해 꿋꿋이 버텨 왔던 한국은 더 이상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2019년 2월 미국은 WTO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상 고소득 국가, 세계 전체 무역량의 0.5% 이상 차지하는 국가 등 4개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이들 중 하나라도 포함되면 개도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밝혔다. 한국의 경우 미국이 제시한 4개의 조건 모두에 해당된다. 즉 현실적으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경기도의 한 비닐하우스 논에서 열린 ‘2019년 여주쌀 첫 벼 베기’ 행사에서 농민이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다. ⓒ 연합뉴스
경기도의 한 비닐하우스 논에서 열린 ‘2019년 여주쌀 첫 벼 베기’ 행사에서 농민이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다. ⓒ 연합뉴스

‘선진국’ 분류되면 시장 대부분 개방해야

한국이 개도국 지위에 집착했던 이유는 농산물 시장 개방이나 각종 보조금과 관련한 규정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분류되면 관세를 낮추고 농산물 시장 대부분을 개방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 지지를 위해 지급하는 보조금에 대해서도 각종 규제가 가해진다. 다자간 무역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 협상에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사항을 살펴보면 개도국은 특별품목 12%, 민감품목 5.3% 등 최대 17.3%에 대해 관세 감축을 최소화할 수 있다. 반면 선진국은 전체 농산물의 4%만 민감품목으로 보호하고 나머지는 관세를 대폭 인하해야 한다. 특별품목 제도도 활용할 수 없다.

‘쌀 소득 보전 고정 직접 지불금(쌀 직불금)’을 포함한 농업 보조금 감축도 불가피하다. 그동안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아 농업보조총액(AMS)을 연간 1조4900억원까지 쓸 수 있었다. 정확한 예측은 어렵지만 선진국으로 지위가 바뀌면 지급한도는 약 7000억원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2019년 쌀 직불금 예산이 8000억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쌀을 제외한 모든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거나 쌀 직불금의 대폭적인 감액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농업인 입장에서 보면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30년 만에 큰 변화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쌀이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쌀 가격은 통상 국제 시세의 5배라 정부는 쌀에 대해 513%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실제 우리가 먹는 장립종(자포니카) 품종 가격으로 비교하면 국내 쌀 가격은 국제 시세보다 약 2~2.5배 높아 이런 관세가 과도하다는 비판을 국제사회로부터 계속 받고 있다. 한국은 대신 일정 수준의 시장접근을 허용하기 위해 연간 40만8700톤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는 쌀을 가공용으로만 수입했지만 이런 조치가 국제규범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에 따라 밥쌀용을 의무적으로 수입해 오고 있다.

선진국으로 지위가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선진국에 허용되는 관세 범위가 현재 절반 수준이므로 수입쌀의 경쟁력이 대폭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단기간 내 수입량이 늘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미국 등에서 풍년으로 쌀 가격이 급락할 경우 수입될 가능성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또 중국의 경우 자국 내 판매보다 한국에 판매하는 것이 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수출을 적극 추진할 수 있다. 더불어 베트남, 태국 등 주요 쌀 수출국도 추가 관세 인하를 강력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 쌀을 기반으로 한 국내 농업의 대폭적인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쌀 외에 채소와 과일 등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과거 이런 작물들은 선도 유지의 어려움으로 장거리 운송이 곤란하다고 간주됐다. 하지만 최근 보관·운송 기술의 발달로 과일의 경우 수입이 용이해졌으며 과거에 비해 그 양도 급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관세 인하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출 경우 과일을 넘어 각종 채소의 경우에도 수입량이 대폭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로 인해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고 있는 저소득층의 경우 비싼 국내 농산물 대신 해외 수입품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아 의외로 빠른 시기에 시설농업 및 과수원 등에 대한 구조조정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렇듯 과거와 같은 대폭적인 보조금 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농업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동안 한국 농업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생산성이 낮다는 근본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해외 국가들은 농업을 산업으로 간주하고 효율화와 생산성 제고에 노력해 왔다. 관세장벽이 낮아지면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근본적인 체질 변화와 시스템 혁신만이 남은 길이다.

 

근본적인 체질 변화와 시스템 혁신만이 살길

21세기에 걸맞지 않은 공룡 같은 관련 조직과 기구를 슬림화하고 농업에 대한 대자본 참여, 작목별 생산 조직화를 추진해 경쟁체제를 확보해야 한다. 또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저급품 및 부산물 활용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일찌감치 구조개혁과 경쟁력 향상에 나섰다면 좋았겠지만 농업 그리고 쌀이라는 존재의 위치로 인해 자발적 변화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외부 요인으로 인해 더 이상 과거 시스템에 머물 수 없게 됐다. 위기라면 위기지만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진정한 산업화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과거 농업사회엔 쌀이 제일 중요했다. 쌀 가격을 떠받치는 것이 농민과 농업 그리고 농촌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변했다. 농민과 농업 그리고 농촌을 분리해 접근할 때가 됐다. 농민에게는 농민연금과 같은 복지를, 농업은 대규모 자본 진출을 허용함으로써 산업화의 길을 걷게 해 줘야 한다. 신토불이와 같은 논리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변화를 거부하기보다는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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