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사회] ‘대한민국’은 어떻게 움직이나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4 13:00
  • 호수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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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캐슬》 이상의 ‘기회 불평등’에 폭발한 여론

1996년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비행기를 탄 도로시(러네이 젤위거). 일반석에 탄 그녀는 우연히 1등석 승객들의 행복한 대화를 듣게 된다. 그러곤 곧 침울해한다. 아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1등석이 부러워서 그래. 예전에는 1등석에 더 나은 기내식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더 나은 인생이 있네.”

2019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조국 대란’에 흔들린 상당수 한국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만 존재하는 ‘코리안 드림’이 있었다. 그렇게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세습사회’라는 네 글자가 무겁게 자리 잡았다. 금수저·흙수저로 대변되는 ‘수저계급론’은 대한민국을 가장 잘 설명하는 ‘진리’로 회자됐다.

비약일까. 데이터를 보면 이런 여론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사저널이 9월16~1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 10명 중 9명은 한국이 부와 지위가 대물림되는 세습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는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도 계층 이동을 하기 어렵다’는 의견에 전체의 82%가 동의했다. ‘우리 사회의 세습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의견에도 84% 이상이 공감을 표했다. 여론은 펄펄 뜨겁게 끓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여론은 펄펄 끓고 있을까? ‘조국 대란’으로 촉발된 세습사회 논란은 왜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들었을까? 너무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쉬운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세습사회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기 때문이다.

‘청년 전태일’ 회원들이 9월11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과의 대담’에 대한 청년들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청년 전태일’ 회원들이 9월11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과의 대담’에 대한 청년들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공정성이라는 역린 건드린 ‘조국 대란’

이미 재벌들은 2세를 거쳐 3세와 4세로까지 세습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 일감 몰아주기 등 편법적이고 전사적인 노력이 투입된다. 대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견기업은 중견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부와 지위를 대물림한다. 이 세습에 어떤 명분이나 공정성은 없다. 핏줄만이 있을 뿐이다. 재계만의 문제일까. 물론 아니다. 정계, 문화계, 연예계 등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일은 계속 반복 중이다.

그런데 왜 유독 여론은 이번 ‘조국 대란’에 ‘튀게’ 반응했을까? 기울어진 언론의 탓일까? 왜 우리는 ‘어떤 세습을 유독 불공정하다고 느낄까?’ 시사저널은 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을 쫓다 보면 ‘세습사회 대한민국’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해 볼 수 있다고 봤다. 또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세습사회 대한민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여겼다.

‘조국 대란’의 핵심은 ‘공정성’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청문회 과정에서 사모펀드 문제, 웅동학원 문제 등 각종 의혹이 확산됐지만 여론이 폭발적으로 움직일 때는 늘 ‘공정성’이라는 한국 사회의 역린을 건드릴 때였다. ‘내로남불’ 논란이 그랬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던 그가 알고 보니 자신의 삶을 그렇게 꾸려오지 않았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비판적 여론은 강하게 형성됐다.

여기에 주목할 지점이 있다. 왜 여론은 야당 국회의원의 자녀 취업 특혜 의혹 때와 다른 강도로 반응했을까?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KT 딸 부정채용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대학만큼 취업은 한국 사회에서 예민한 문제다. 하지만 비판 여론의 강도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달랐던 대중의 기대치가 여론 차이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된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여론은 조국이, 문재인 정부가 더 정의롭고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높았던 기대만큼 실망과 배신감이 컸던 것이다.

조국 대란이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삼키기 시작한 순간은 그의 딸 논문 문제가 불거졌을 때부터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 문제는 병역 문제와 함께 가장 ‘공정성’이 요구되는 분야다. 단일대오를 유지하던 문재인 정부 지지 진영이 쪼개지기 시작한 시점도 이때부터다. 조 장관의 딸은 한영외고에 다니던 2008년 단국대 의대 의과학연구소에서 인턴으로 2주간 활동하며 의학 실험을 도왔다. 장영표 단국대 의대 교수는 이 실험으로 의학 논문을 쓰고 제1저자에 조 장관의 딸을, 자신의 이름은 책임저자에 올렸다.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여론은 폭발했다. 2030 청년층이 강하게 반발했고, 그들의 부모 세대도 연이어 흔들렸다.

여론은 왜 다른 이슈가 아닌 자녀의 교육 문제에 폭발했을까? 지금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측에서 자유한국당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의혹도 역시나 ‘교육 문제’다. 나경원 원내대표 아들이 미국 고등학교 재학 시절 대학 실험실에서 3주 정도 실험을 하고 의공학 관련 논문 포스터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의혹이다.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교육 문제가 여론의 향배에 중요한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들만의 ‘교육 사다리’…믿음이 깨졌다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교육은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라는 신화, 일종의 ‘코리안 드림’을 꿈꿀 수 있게 해 주는 유일무이한 ‘사다리’였다. 출신 배경도 상관없었다. 수능시험이나 사법고시와 같은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졌다. 반칙과 특권이 없는 유일하게 공정한 기회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육이라는 운동장에서 벌어진 승패에 승복했다. 또 여기에 권위를 부여했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한 ‘능력’이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한 차별은 ‘나쁜 차별’이 아닌 ‘정당한 대우’라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즉 교육 사다리는 공정하며, 경쟁을 통해 위로 올라간 이가 더 많은 과실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최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에서 시험에 합격한 ‘공채 출신’들이 ‘비공채 출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강한 반감을 보이는 것은 이런 맥락에 기인한다.

물론 교육 사다리가 공정하다는 인식은 많이 희석됐다. 오히려 대중은 이제 교육이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기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대학 입시가 초등학교 때 결정된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기다. 영어유치원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여기엔 모두 부모의 부와 지위, 가용 시간과 같은 자원이 요구된다. 고등교육으로 가면 부모의 능력은 더욱 중요한 변수가 된다. 해외 유학과 석·박사 학위라는 황금 티켓은 ‘노력으로 인한 능력’보다는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기회처럼 여겨진다.

분명히 대중은 부의 정도에 따라 교육 사다리 진입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서울 대치동처럼 사교육 1번지에서 더 좋은(?) 사교육을 받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 외고와 같은 특목고를 다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별했다. 그럼에도 대중은 최소한 공정성의 서사를 믿었다. 대중에게 교육 사다리는 마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과 비슷했다. 출발선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노력하면’ 그래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고, ‘죽도록 노력하면’ SKY(서울·고려·연세대)라는 왕관을 손에 쥘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 계급에 따른 세습 문제’ 두고두고 논란 부를 듯

그런데 이번에 그 믿음이 깨졌다. 대중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중의 상상력은 드라마 《SKY캐슬》에서 그려진 정도였다. 부자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입시 코디’라고 불리는 ‘입시 컨설턴트’를 고용하고, 24시간 맞춤형 관리를 하고, 자기들끼리 독서 토론을 하고, 그 모임을 현직 로스쿨 교수가 주도하고, 그래서 SKY를 많이 보내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드라마 속 설정만으로도 한국 사회는 적잖이 놀랐는데, 이번 조국 대란에서 드러난 ‘고등학생 논문 제1저자’는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영역이었다. 대중은 이런 ‘사적 네트워크’로 이뤄진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하는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 놀라움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1등석에는 더 나은 기내식이 있는 것 정도로만 알았던 대중이 그곳에 ‘더 나은 인생’으로 가는 ‘특급 티켓’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특급 티켓은 그들만의 리그인 사적 네트워크에서만 나오고, 자신들은 그런 기회를 영영 가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왕관을 갖기 위해 버티는 무게, 내 자식이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 무게를 그들의 자식들은 가뿐히 피해 가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훗날 사회에서 그들은 더 많은 능력을 인정받아 갑(甲)으로, 내 자식은 을(乙)로 살아가게 될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과 다름없다. 조국 대란이 벌어진 이유다.

조국 대란은 ‘그들만의 리그’를 다층적으로 분화시켰다. 서민들의 박탈감과 중산층의 박탈감이 서로 달랐다. 청년층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학내 촛불집회가 불러온 논란이 그렇다. 그들에게도 이번 논란은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마저도 사치로 보였다.

지난 8월31일 청년 노동운동 단체인 ‘청년 전태일’이 마련한 공개 대담회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행사에는 구의역 김군의 동료로 함께 일했던 정주영씨가 참석했다. 정씨는 무대에 올라 “사실 이번 논란이 불편하다. 이마저도 있는 사람들끼리의 논란이라는 생각이 든다. 형편상 공고에 들어가 졸업하기도 전에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죽는 동료를 지켜봐야 했다. 우리와 엘리트 인생 사이에 어찌 출발선이 같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조국 대란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 분명히 존재했지만,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많은 문제를 끄집어 올렸다. 특히 교육 계급에 따른 세습 문제는 앞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대한민국은 알아버렸다. 역사는 뒤로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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