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문제 대처, 왜 독일과 일본은 이리도 다를까
  • 독일 뮌헨/ 클레어 함 프리랜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7 17:00
  • 호수 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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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과거사 사죄하는 독일…강제 노동자 배상 위해 재단 설립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독일은 끊임없이 과거사 사죄를 한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뱌에서 무릎을 꿇은 뒤, 독일 정부 고위직들은 피해 국가의 종전 관련 행사에도 직접 참석하며 고개를 숙인다. 독일 정부는 종전 후 역사 청산을 위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머물지 않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나치를 찬양하는 이들은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조치 했다.

독일과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같은 전범국이지만, 오늘날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전혀 다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야기할까”라는 필자의 질문에 지난 몇 년간 일본에서 작가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독일인 펠릭스 릴은 “과거의 독일 상황은 여러모로 일본과 큰 차이가 있다”며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요인으로 분석했다.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9월1일 2차대전 첫 폭격 현장인 폴란드 비엘룬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 AP 연합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9월1일 2차대전 첫 폭격 현장인 폴란드 비엘룬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 AP 연합

“정치교육 통해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 공유”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과 서독, 양국의 사회와 정치인들은 연합군에 의해 아주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당시 독일은 연합군 측의 군사적 통제 및 경제원조에 의지하고 있었던 터라, 전쟁을 시작했던 자국의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웠다. 또한 독일은 전범재판 이외에도, 주요 공직에서 과거 나치 관련자들을 축출해 내며 ‘나치 청산’이라 불리는 역사청산의 과정을 겪었다. 이런 경향은 전범 나치 세력은 독일 사회에서 절대 환영받지 못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했다.

일본과는 달리 독일의 경우, 2차 세계대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1945년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원폭투하 사건을 역사왜곡 수단으로 삼고 있다. 물론 원폭 피해와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 사실은 별개의 문제이나,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자국의 가해성과 피해성 양면이 타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회피할 좋은 구실거리가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인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생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는 1960년대다. 당시는 전쟁세대의 자녀들이 성인기를 맞는 때였고, 이들은 부모세대가 과거사에 대해 정직하게 밝힐 것을 큰 목소리로 요구했다. 이전의 독일 정치는 광의적 차원의 사회적 화해에 집중하기보다, 정치경제 및 외교적 차원의 재건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1960년대의 젊은이들은 독일 사회가 과거의 역사를 직면하고, 아울러 인식의 변화를 이뤄내게 하는 동력이었다. 반면 일본에선 이러한 대규모의 사회적 압박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청산의 기저에 ‘68학생운동’(1968년 서독에서 일어난 나치 청산 학생운동)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에서도 종전 후 대부분의 부모세대와 보수세력은 전쟁범죄에 대해 침묵했다. 이에 대한 젊은 세대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계기로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이런 역사인식에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민 정치교육의 영향도 존재한다. 하네스 모슬러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교수는 지난 8월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은 정치교육 등을 통해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해 왔다. 극우주의자 말고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독일 사회의 총의가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라며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정치교육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의 지속성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노력하고 반성하는 데 달려 있다. 그래야 피해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독일이 지금의 과거사 반성에 대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사는 워낙 이해관계가 다양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확실히 해결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독일 안팎에서도 여전히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예를 들어, 유대인 대규모 학살 이외의 동성애자·장애인·집시 같은 소수자 집단 학살에 대한 추모비 건설은 매우 늦게 진행되었다.

 

그리스 배상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또한 폴란드와 그리스의 전쟁 배상 문제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특히 그리스의 경우는 한·일 양국 간 논쟁의 근원인 한일협정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2차 세계대전으로 6만~7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 약 330만 명의 희생자를 낸 그리스는 독일과의 배상 문제로 갈등을 겪어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나치 점령기(1940~44년) 당시 디스토모 양민대학살 사건이다. 디스토모라는 작은 마을에서 나치군에 의해 신생아 및 임신부를 포함, 218명의 양민이 2시간 만에 잔인하게 대학살된 참사다. 이후 유족 측의 꾸준한 법정투쟁을 통해 그리스와 이탈리아 대법원에서는 승소했으나, 독일 법원과 헤이그의 사법 시스템은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그리스와 체결한 ‘1960년 불가역적 양국협정’ 및 1990년 독일 통일 전 체결했던 ‘2+4 협약(Two Plus Four Agreement)’을 언급하며, 충분한 배상을 해 왔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리스는 1960년 협정에는 반인류범죄와 인프라 파괴 등이 포함되지 않았고, 1990년 당시도 협약 당사국이 아니어서 배상 요구를 하지 못했다고 강변해 왔다. 현재 이 분쟁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나, 독일의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지난해 그리스를 방문해 나치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전쟁범죄와 관련해 전승국들과 피해 국가들에 국가배상금을 이미 지급했으며, 따라서 배상에 관한 법적 문제는 해결했다는 입장이다. 일본과 달리, 개인 배상권도 일부 인정해 주었기에 나치 치하 독일 기업에 강제 동원되었던 외국인들이 부분 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로 배상을 못 받은 외국인 피해자들은 끈질기게 대책을 요구했다. 독일 정부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몇백만 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는 물론 주변국에서 840만 명을 동원해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알려진다.

결국 2000년, 사민·녹색당 연합정권은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여야 만장일치로 결의해 설립했다. 노예노동 및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와 6500여 개 민간기업은 26억 유로씩, 총 52억 유로(약 6조854억원)를 출연했다. 이 배상금의 수혜자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100개국 166만 명에 달했는데, 특히 동유럽 출신 피해자가 많았다.

독일은 모든 면에서 일본과 비교된다. 2015년 5월, 독일 메르켈 총리는 아베 일본 총리의 역사인식을 비판했던 아사히신문을 방문해 “과거를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만이 주변국과의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이라며 “역사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끊임없이 사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베 총리 면전에서 일본의 그릇된 역사인식에 일침을 가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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