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존재’로 세계인에 다가서는 유관순 열사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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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8화 - 아시아의 반식민 여전사들

살아 있을 때 보다 죽어서 더 이름의 가치가 높아지고 사람들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자를 ‘불멸의 존재’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수많은 영웅들과 신화를 낳았지만,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영웅담 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구국의 성녀’로 추앙받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나 우리 유관순 열사가 그렇다. 이들 말고도 ‘만주벌 소녀 전사’ 이봉선 역시 이에 버금가는 숨은 영웅이다. 그는 2009년 중국 정부가 건국 60주년을 맞아 선정한 ‘건국 영웅 100인’에 이름을 올린 조선인 3명 중 하나다.

이봉선(1919~1938)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강에 투신한 8명의 여전사를 일컫는 ‘팔녀투강(八女投江)’이란 신화 속 주인공이다. 17세 때 동북항일연군에 들어간 그는 선전·정찰 활동을 펼쳤고, 일본군 250명을 사살한 ‘흑할자요 저격전’에서는 전투병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8년 11월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 1000여 명이 포위망을 조여오자 이봉선과 여전사들은 이를 피해 강을 건너다 적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치열한 교전 끝에 이들은 투항을 거부하며 ‘다 같이 손을 잡고’ 강물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현재 헤이룽장성 무단장에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소총을 쥔 이봉선의 석상이 세워져 소녀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8월11일 서울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유관순 열사의 모습과 기도문 인용 문구가 담겨 있다. ⓒ연합뉴스
8월11일 서울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유관순 열사의 모습과 기도문 인용 문구가 담겨 있다. ⓒ연합뉴스

‘팔녀투강’부터 ‘다양다양’까지…신화 속 주인공 된 아시아의 반식민 여전사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나이 어린 소녀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한 역사가 있다. 얼마 전 필자는 아시아 독립운동을 다루는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베트남을 찾았다. 제작진은 먼저 호찌민 시에서 차로 2시간 남짓 떨어진 붕따우란 해안 도시를 향했다. 휴양지로 잘 알려진 이곳은 보티사우(1933~1952)라는 여성 애국열사의 고향이다. 마차운전사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쌀국수를 파는 어머니를 둔 그는 열세 살 때부터 오빠들을 따라 항쟁에 나섰다.

항불 민병대에 들어간 보티사우는 1948년 7월 식민당국 경찰서 앞에서 열린 프랑스 독립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민족반역자 23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동이란 이름을 가진 프랑스 부역자 사무실에 폭탄을 던져 큰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동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방첩기관의 책임자로 악명이 높았다. 1950년 2월 보티사우는 자신의 집 근처 시장에서 카 데이와 카 수트라는 식민당국 앞잡이들을 향해 또 다시 폭탄을 던졌다. 이때 현장에서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봉선과 그의 석상. 오른쪽은 보티사우와 그의 생가 옆에 세워진 동상
이봉선과 그의 석상. 오른쪽은 보티사우와 그의 생가 옆에 세워진 동상

19살 나이로 사형대에 오른 보티사우는 “눈가리개를 풀어 달라. 조국 산하를 보며 죽고 싶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흔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제작진은 붕따우 해안에서 180km 남짓 떨어진 꼰다오 섬으로 향했다. 보티사우가 묻힌 한증 국립묘지 입구에는 그의 동상과 대형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일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그의 묘역에는 줄잡아 100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였다. 한데 희한하게도 많은 이들이 한참 동안 주문을 외며 수십 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참배가 아니라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이었다. 안내를 맡은 이 섬의 역사문화지도원 타이 반 프억(35)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건강·재산·교육 등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면서 본격적인 참배 행렬은 밤 11시에 시작된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식민지 시절에 경찰의 눈을 피해 참배해 온 관습이 굳어진 때문”이었다.

선뜻 믿기 어렵지만 그의 묘역에 서있는 3개의 비석에도 ‘소름 돋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꼰다오 섬은 식민지 시절 애국지사들을 가둔 ‘감옥 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앳된 소녀가 처형되자 죄수들이 보티사우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식민당국의 치안 책임자가 “비석을 깨는 자에게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쓰윽이란 자가 나서 한 조각을 깨더니 갑자기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것이다. 또 얼마 뒤에는 이 섬 관리인의 부인이 밤마다 보티사우가 꿈에 나타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고심 끝에 제사를 지내줬더니 그 뒤론 꿈에 나타나지 않아 부부가 추모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미신인지 신통한 능력을 지닌 영적인 존재로 거듭 난 건지 모를 일이지만, 그가 여전히 산 자들의 가슴에 살아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왼쪽은 보티사우의 사당. 그의 묘역과 참배객들. 가운데는 일부 훼손된 비석
왼쪽은 보티사우의 사당. 그의 묘역과 참배객들. 가운데는 일부 훼손된 비석

스페인과 미국의 오랜 식민 지배를 거친 필리핀에서는 첫 항일 게릴라조직을 이끈 여전사 펠리파 쿨랄라가 돋보인다. 그는 ‘다양다양’이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스페인 침략자와 맞서 싸운 무슬림 공주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근육질의 남성적인 체구를 가진 그는 어릴 때부터 농민운동을 펼쳐 고향 칸디바에서 지주들을 몰아내기도 했다. 1942년 1월 일본군이 미군을 내쫒고 마닐라를 점령하자 쿨랄라는 마을 청년 35명을 규합해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부대원이 곧 130명으로 늘어나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식량을 구하러 나온 부대원 8명을 붙잡아 마을회관에 감금시켰다. 그러자 쿨랄라는 이곳을 공격하고 부하들을 구출해 만딜리라는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쫒아오자 쿨랄라는 매복 작전을 펼쳐 일본군과 필리핀 친일경찰 1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이 만딜리전투는 필리핀에서 첫 항일전투로 기록되었고, 반일정신을 확산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일로 쿨랄라는 일본군의 수배 명단에 올랐는데 현상금이 무려 50만 페소를 넘었다고 한다. 그 무렵 루손 섬 중부지역에서 일본 침략자와 지주계급 타도를 내건 항일 게릴라군 ‘후크발라합’이 결성됐다. 후크발라합은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부대원과 동조자만 57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세력을 늘려 나갔다. 당연히 쿨랄라는 이 조직의 최고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추대되어 일본군 공격에 앞장서게 되었다.

하지만 1943년 말 난데없이 쿨랄라와 그 부대원들에게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부대 도착에 맞춰 돼지와 닭 요리를 준비해 놓으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심지어 “돈과 보석을 빼앗겼다”는 주장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쿨랄라는 사령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유죄 판정이 내려져 사형에 처해졌다. 훗날 동료 여전사들은 당시 남성 중심의 ‘마초’ 조직이 유일한 여성 지도자인 쿨랄라를 모함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여하튼 항일 게릴라의 전설이 하루아침에 마적 두목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쿨랄라를 스케치한 그림과 후크발라합 게릴라 부대원들
쿨랄라를 스케치한 그림과 후크발라합 게릴라 부대원들

순국 99주년 유관순 열사, ‘세계인의 누나’로 거듭나길

쿨랄라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제국주의 폭력 시대를 살아내며 신화를 써내려간 일은 부정할 순 없다. 그 행위의 장렬함에서도 영웅이라 부르기에 주저되지 않는다. 이봉선과 보티사우 역시 그러하다. 이렇듯 나이 어린 소녀들이 애국이란 시대적 가치에 목숨을 바친 일은 우리 유관순 열사의 그것과 닿아있다. 다만 이들이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했다면 유관순은 맨몸으로 총칼에 맞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를 작지만 큰 차이로 볼 수 있는 건 유관순의 행위에는 오늘날 세계인의 시대정신인 ‘평화’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9월28일은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지 99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번 순국일은 열사가 지난 3월 독립운동의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으로 추가 서훈된 터라 더욱 의미가 크다. 거기에다 작년에 미국 뉴욕타임스가 ‘간과되어 온 여성들’이란 기획연재물을 통해 유관순 열사의 부고 기사를 ‘뒤늦게’ 게재했다. 이 신문은 모두 8페이지에 걸쳐 3·1운동과 열사의 행적을 상세히 소개했다. 더구나 지난 1월에는 뉴욕주 의회가 매년 3월1일을 ‘유관순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사망한지 100년이 되었어도 이름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유관순 열사야 말로 진정한 ‘불멸의 존재’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영원한 누나’가 이 시대 저항과 인권,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세계인의 누나’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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