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필요한 ‘깃발’과 ‘노래’는 무엇일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12 17:00
  • 호수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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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깃발의 자리, 노래의 자리

10월3일 광화문광장에 모인 탈북자 중 일부가 《적기가》를 부르며 청운동 청와대 앞길로 ‘진격’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마음에 남은 기사다. 《적기가》의 역사는 길지만, 간략히 말해 사회주의자의 행진곡 비슷한 거다. “비겁한 자여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혁명의) 붉은 기를 지키리라”라는 가사는 황장엽이 탈북했을 때 북한이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 노래를 현재 남한 정부의 청와대를 전복하자라는 진격의 노래로 사용하다니, 웃을 일인지 놀랄 일인지 모르겠다.

상상을 가미해 해석하자면, 이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배반한 북한을 탈출했으나 마음속엔 여전히 붉은(사회주의) 꿈이 있었고, 자유로운 남한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꽃피는 정치를 꿈꾸었으나 다시 배반당해 폭력적인 진격을 하려 한 것이며, 그 무의식이 《적기가》로 드러났다? 물론 실제로는 오히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남한살이에의 분노가 분출할 구멍을 만나자 《적기가》라는 노래가 자연스레 공통의 발걸음을 만들어주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노래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깃발은 그런 것이다.

10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보수단체 회원 등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10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보수단체 회원 등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조국 타도’ 집회에서 울려퍼진 노래 “아아~ 우리 조국”

노래 하니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10월3일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이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을 불렀다 해서 화제다. “아아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이라는 가사 때문이다. 조국이라는 말은, 생각과 상징의 획일화를 통해 손쉽게 지배하기를 꿈꾸는 군부독재자들이 자주 애용한 애국주의적 언어다. 북한에서도 《나의 조국》은 최고로 쳐주는 시 제목이고, 남한에서는 심지어 박정희 작사·작곡 노래도 있다. 《적기가》의 적기가 인민의 가슴속에 펄럭이는 이데올로기라면, 《나의 조국》의 조국은 인민을 향한 독재자의 일편단심이었을까. 그 “나의 조국”을 조국 타도 집회에서 불러대는 일도 웃프다. 의식의 분열을 가져올 것 같다. 광화문에 모인 분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나오는 습관이 있는데, 이전 한때는 욱일기도 들고 나오다가 시국이 시국인지라 욱일기는 사라졌다 한다. 애국하는 태극기, 충성하는 성조기라는 뜻일까. 하여간 노래는 그런 것이다. 깃발도 그런 것이다.

깃발의 백화제방은 2016년 겨울 탄핵집회였을 것 같다. 천하제일깃발대회라는 별칭까지 붙은 이 시절의 깃발들은 발랄하기 그지없었다.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등등. 《적기가》나 태극기를 앞세운 깃발과는 사뭇 다른 이 깃발들은 10월5일의 서초동에선 개인이 두른 휘장으로까지 분화를 했다. 그러나 깃발은 역시 휘날려야 맛이고, 우러러야 멋이며, 가슴 뛰는 연대의 표상이어야 제자리에 간 것이 아니겠나.

문득, 여성들의 노래가 있을까, 여성들의 깃발이 있을까 질문해 본다. 여성들은 단일한 깃발을 잘 만들지 않는다. 2008년 촛불집회 때 태평로 밤거리에서 분홍색 천에 ‘배운녀자’라는 손글씨를 쓴 깃발을 앞세우고 모여 있던 젊은이들을 만났을 때의 감동은 어떤 성격이었을까.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가장 중요한 정치운동은 페미니즘에서 탄생할 것이다. 어떤 기를 들고 어떤 노래를 부르면 힘이 생길까. 여성 노동자의 노래?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여성의 노래? 깃발은 역시 붉은색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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