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빛의 과거》 통해 1970년대 젊은이들 소환한 은희경 작가
  • 조철 북 칼럼니스트 (sec@sisajournal.com)
  • 승인 2019.10.20 12:00
  • 호수 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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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각자 달랐고, 모두가 고유한 삶이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나쁜 버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소설을 따라가는 일기’라는 제목의 파일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럴듯함을 경계하자. 가장 비겁하고 천박한 것. △자꾸 외연을 넓힌다. 힘이 덜 빠진 것이다. 힘을 잘 빼면 안 무거워지는 한편 안 가벼워진다. △왜 집중이 안 돼? 아무 쓸모없는 화려한 문장만 만들고 있다니. 이게 공허한 무기 자랑이 아니고 뭔가.’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최근 신작 장편소설 《빛의 과거》를 펴낸 은희경 작가가 출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012년 《태연한 인생》을 펴낸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니만큼 깊이 숙고해 오랫동안 쓰고 고쳤던 것이다.

1977년 발사된 미국의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호에 실린 디스크에는 ‘혹시나 만날지도 모르는 외계 생명체를 위한 지구의 자기소개서’가 들어 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환영 인사말, 당시 유행하던 노래와 보들레르의 시, 지구의 사진 등이 포함된 이 음반의 이름은 ‘지구의 목소리’다. 《빛의 과거》는 인간에게서 떠나 가장 멀리까지 간 보이저호에 실린 ‘지구의 목소리’처럼,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는 ‘어제의 목소리’가 돼 오늘의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360쪽│1만4000원 ⓒ 박재홍 제공
《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360쪽│1만4000원 ⓒ 박재홍 제공

그때 그 여자들, 사적이며 공적인 ‘나’의 이야기

“기숙사는 출신지와 부모로부터 벗어나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십대 초반 여자 대학생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지점으로부터 다른 조건을 지니고 떠나왔다. 이제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야 하는 만큼 의식하든 안 하든 자기라는 존재가 다름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같은 생활공간에서 그 다름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2017년의 ‘나’는, 작가인 오랜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 여자대학 기숙사에서의 한때를 떠올린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다르다. 은 작가는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주친 첫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그려낸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통해 다양하며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을 제시하고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회피를 무기 삼아 살아온 한 개인이 어제의 기억과 오늘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민낯을 직시함으로써 삶에 놓인 인간으로서 품는 보편적인 고민을 드러낸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렇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학생들은 독재정권에 맞서 전단을 돌리고 어용 총장 임명에 항의해 검은 리본을 달았다.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구금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지만, 매사에 튀지 않고 나서지 않으며 한 발을 빼는 주인공의 삶의 방식 역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다. 주인공이 ‘모범’ 혹은 ‘평범’이라는 태도를 걸치기 시작한 큰 원인은 말더듬증이다. 군사훈련을 연습하는 수업인 ‘교련’ 시간에 구령 외치기를 강요당하고부터 말더듬증 트라우마가 강화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회피’라는 수동적 처세 방식은 오롯이 개인의 나약함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듯하다.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 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차이는 개인차다”

책의 띠지에 ‘불완전한 우리가 마주친 다름과 섞임의 세계’라고 부제처럼 달았다. 각기 ‘다른 주인공’으로 살아오면서 서로를 다르게 기억하는 ‘우리들’을 소환한다.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았을 것이기에 어디에 속했든 무엇을 했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은 작가는 소설 속에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라고 반문한다.

“진짜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르다는 것.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고정관념을 갖고 생각해 버리기 쉬운 것 같다. 젠더로 나누고, 세대로 나누고, 계층으로 나누는 식으로 사람을 유형화하거나 대상화하는데, 거기에 항상 문제를 많이 느껴왔다. 어떤 소설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차이는 개인차다’라는 말을 쓴 적도 있는데, 사람은 다 각자의 고유성을 가진 다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빛의 과거》에 더 많이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은 작가는 ‘궁극적으로 여성 악역은 없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악역을 등장시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한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이 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 소설에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극적인 장면이 없어서 이야기가 좀 심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빛의 과거》는 여러 가지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소설로 쓰고 싶었다. 약자로서의 여성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이런 존재를 악역으로 만드는 게 용납이 안 되었고, 그렇다고 모든 약자가 선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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