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핫도그 사 먹고 올게.” 지난 1975년 8월20일 오후 8시쯤, 부산시 서구 장림동에 사는 김현정양(7)은 몇 푼의 돈을 가지고 혼자 집을 나섰다. 김양은 거의 매일 습관처럼 핫도그를 사 먹는 ‘핫도그 마니아’였다. 가게는 집에서 도보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었다. 엄마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아이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김양의 부모는 걱정하는 마음에 핫도그 가게로 찾아갔다. “우리 아이 여기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주인은 “핫도그를 산 후 집 쪽으로 뛰어갔다”고 말했다.
아이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김양의 부모는 파출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파출소 직원들과 인근 주민들까지 김양을 찾아 나섰다. 인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봤다는 목격자도 없었다.
다음 날 오전 5시45분쯤, 중구 동광동 용두산공원 관리인이 공원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눈에 뭔가 띄었다. 다가가 보니 여자아이의 시신이었다. 팬티만 입은 채 러닝셔츠로 손발이 묶인 참혹한 모습이었다. 관리인은 곧바로 공원파출소에 신고했다. 공원파출소는 본서인 중부경찰서에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타살 정황’ 무시한 경찰의 초동수사
형사들이 현장에 출동한 것은 보고 후 2시간이 지난 오전 8시쯤이었다. 이들은 현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시신의 복부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범천동 이정숙이가 대신공원에서 죽었다’는 이상한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이것도 본체만체했다.
시신과 현장을 확인한 경찰의 다음 행동은 더 가관이다. 상부에 “걸인으로 보이는 여아가 식중독 내지 약물 중독으로 죽어 있었고, 외상 흔적이 없어 타살로 보기 어렵다”는 엉터리 보고서를 작성해 올린 것이다. 타살 정황이 넘쳐나는데도 경찰은 이를 무시하고 사건을 대강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찰은 시신의 신원을 수배했다. 이를 접한 김현정양의 부모는 “전날 실종된 우리 딸 같다”고 연락했다. 김양의 부모는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했다. 무사히 귀가하기를 바랐던 딸이 싸늘한 주검이 돼 차가운 영안실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김양의 부모는 ‘유괴 살인’이라고 주장하며 경찰에 적극적인 수사를 요구했다. 경찰은 그제서야 허겁지겁 수사 방향을 ‘살인 사건’으로 잡았다.
살인 사건의 경우 현장보존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현장에 범인의 흔적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경찰의 안일한 대처로 현장이 제대로 보존됐을 리가 없었다. 실제 현장은 훼손됐고 범인의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발견 당시 김양의 시신은 팬티만 입고 있었는데 나머지 옷과 신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이 범인이 도주할 시간만 벌어준 셈이 됐다.
경찰은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사건이 워낙 끔찍해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변사 사건으로 상부에 보고했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부검 결과 김양의 사망원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이마와 오른쪽 귀 밑에는 심한 타박상이 있었다. 시신의 상태로 보아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의 초동수사 실패는 며칠 후 또 다른 살인을 불렀다. 8월24일 저녁 동구 좌천동에서 배준일군(5)이 행방불명됐다. 배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저녁을 먹고 잠자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외출했던 배군의 어머니가 오후 9시쯤 돌아와 보니 집에 있어야 할 아들이 없었다. 가족들은 허겁지겁 밤새도록 배군을 찾았으나 끝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배군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배씨의 공장 직원이다. 그는 사건 당일 오후 7시쯤 집 앞에서 혼자 놀고 있던 배군을 봤다고 했다. 그는 배군에게 20원을 주며 “과자 사 먹고 빨리 들어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게 배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배군의 부모는 아이가 유괴됐을 수 있다고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다음 날인 8월25일 아침, 서구 충무동의 부산공동어시장 옆 상자 야적장에서 “남자아이 시신을 발견했다”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적재장에 나와 일하던 한 상인이 한쪽에 쌓여 있던 사과상자 더미에서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마치 사람의 작은 손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상자를 들춰보니 그 안에는 손발이 결박된 채 숨져 있는 남자아이 시신이 있었다. 전날 실종된 배준일군이었다. 배군을 묶은 끈은 아이가 입고 있던 러닝셔츠를 찢어 만든 것이었다. 입에는 신문지 뭉치가 박혀 있었고, 이마에는 둔기로 맞은 상처도 보였다.
이번에도 복부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쓴 낙서가 있었다. ‘후하하 죽였다’는, 뜻을 알 수 없는 섬뜩한 내용이었다. 배군의 사망원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판명됐다. 유괴와 살해 수법, 결박 방법 그리고 낙서까지 김현정양 사건과 판박이였다. 필적도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두 사건을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현장에서는 지문이나 DNA 등 범인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나흘 간격으로 ‘연쇄 유괴 살인’이 이어지자 부산 시민들이 느끼는 공포감도 커져만 갔다. 범행 수법으로 볼 때 추가 범행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범행의 목적을 파악하는 데도 집중했다. 금품이 목적이었다면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와야 했는데 범인은 단 한 번도 피해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경찰은 정황상 범인이 ‘성도착증’이거나 ‘정신이상자’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범인에 대한 제보가 절실할 때 한 택시기사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 내용을 보고 경찰에 제보를 해 왔다. 택시기사에 따르면 “8월24일 밤 10시에 좌천동에서 배군과 닮은 어린이를 데리고 있는 30대 남성을 충무동 수산센터 앞까지 태워다 줬다”는 것이다. ‘좌천동’은 배군의 집이 있는 곳이었고 ‘충무동 수산센터’는 시신이 발견된 지점이었다.
경찰은 택시기사에게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는 “나이는 20~30대, 키는 170cm 정도며, 머리가 짧아 두 귀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눈과 오른쪽 코 옆에 2개의 검은 점과 오른쪽 입가에 점 1개가 있었다”고 얼굴의 특징까지 자세하게 진술했다.
용의자 특정 못 해 영구미제로 남아
경찰은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그리고 택시기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몽타주 10만 장을 만들어 부산 지역은 물론 전국에 배포했다. 100만원의 현상금도 걸었다. 검거 경찰관에게는 일계급 특진도 약속했다. 이에 따라 범인 검거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제보도 이어지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경찰은 몇몇 용의자를 검거하거나 연행해 조사를 벌였다. 전북도경은 몽타주와 닮았다는 이유로 김아무개씨(27)를 검거했다. 수사팀은 김씨를 부산으로 압송해 조사를 벌였으나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확인되면서 헛다리를 짚었다. 친지들의 신고에 따라 서구 괴정동에 사는 김아무개씨(21)를 용의자로 조사를 벌였으나 역시 사건 관련성이 없었다. 수사본부는 정신질환자의 소행을 염두에 두고 1000여 명의 명단을 만들어 수사에 나섰지만 용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수사 범위도 점점 넓혀갔다. 두 아이의 시신에 남긴 낙서가 어린이 만화책 문장 스타일과 관계가 깊다는 분석이 나오자 만화가게를 중심으로 탐문수사도 펼쳤다. 러닝셔츠 공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범인이 결박에 사용한 끈은 아이들이 입고 있던 러닝셔츠를 찢어 만든 것이다. 경찰은 끈을 만든 솜씨가 숙달된 점에 착안해 전·현직 러닝셔츠 공장 직공이거나 하역 인부와도 관련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경찰 수사는 또다시 답보 상태에 들어갔다. 어린이가 연쇄 유괴 살해되고 범인이 검거되지 않으면서 국민은 공분했다. 언론은 연일 이 사건을 주요 기사로 다루며 수사 상황을 보도했다. 급기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범인을 빨리 검거하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렸다.
검찰은 수사 지휘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부산지검에 수사본부를 설치했으나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번 수렁에 빠진 수사는 헤어나오지 못했다. 결국 1990년 8월21일과 8월25일, 두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지금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범인이 남긴 낙서의 비밀
범인은 두 어린이 중 김현정양의 시신에 뜻을 알 수 없는 낙서를 남겼다. 복부에다 ‘범천동 이정숙이가 대신공원에서 죽었다’고 적었다. 경찰과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 내용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그런데 김양 사건에 앞서 또 한 명의 여자아이가 납치된 후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된 사실이 드러났다. 놀라운 것은 이 아이의 이름이 바로 ‘이정숙’이었고, 납치돼 끌려간 곳이 ‘대신공원’이었다. 이양의 집이 ‘범천동’에 있었다.
이양은 김양 사건이 있기 이틀 전인 8월18일 피아노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범인과 마주쳤다. 그는 이양 집 앞 골목에서 칼로 위협해 택시에 태워 대신공원까지 끌고 갔다. 그곳 계곡에서 목욕을 시킨 후 이상한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주인님’이라 부르라고 시키더니 이내 ‘아버지’라고 부르라며 주문을 변경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양의 옷을 찢은 후 손발을 결박했다. 이어 허리띠로 목을 졸랐고 이양은 의식을 잃었다. 이때 등산객이 나타나면서 범인은 급히 도주했고 이양은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범인은 이양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김현정양의 배에 이런 낙서를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범인의 기행은 또 있었다. 김현정양의 시신이 발견된 지 이틀 후인 8월23일 오후 11시쯤, 부산 대교파출소에 한 남성으로부터 괴전화가 걸려왔고 이를 방범대원이 받았다. 그는 대뜸 김현정양 사건을 언급한 뒤 “내가 대양공고와 대양중학교 사이에서 죽였다”고 말하고는 끊었다.
약 20분 후 같은 남성으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경찰을 비꼬듯 “수사 잘하라”고 말했고, “어디냐”고 묻자 이번에는 전화번호를 불러주며 복창을 요구했다. 방범대원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범인이 말한 번호는 납치됐다 구조된 이양의 집 전화번호로 확인됐다. 이게 범인이 남긴 마지막 목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