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돌, 무엇이 호평과 혹평을 가르나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2 12: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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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캐릭터 넘어서야 ‘연기자’로 우뚝

최근 방영되고 있는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주인공 동백(공효진)만큼 그 옆자리에 있는 향미(손담비)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처음에는 별 역할이 없는 조연처럼 여겨졌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향미의 과거사까지 등장하면서 호평이 쏟아졌다.

다방을 전전하다 동백이 운영하는 까멜리아에서 일하게 된 향미는 가진 자들을 등쳐먹는 꽃뱀 같은 인물이지만, ‘다 퍼주고 믿어주는’ 동백 때문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동백 대신 연쇄살인마 까불이에게 살해당하는 인물로 시청자들은 그의 마지막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물망초라는 술집을 운영하는 엄마 때문에 어려서부터 갖가지 편견에 휘둘리며 살아왔던 그가 마지막으로 물망초의 꽃말 ‘나를 잊지 말아요’를 말하는 대목에서 편견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딘지 무표정한 얼굴에 낮고 담담하게 깔리는 목소리가 어우러져 손담비가 아니면 향미 역할에 어울릴 인물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른바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는 호평이 쏟아진 이유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 역을 맡은 손담비 ⓒ KBS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 역을 맡은 손담비 ⓒ KBS

호평 이어가는 연기돌, 혹평으로 추락한 연기돌

손담비는 지금껏 연기자로서의 활동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가족끼리 왜 이래》에 출연했고 《미세스캅2》에 나왔지만 그 연기로 가수 이미지를 깰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에서의 향미 역할로 손담비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아직 다양한 연기를 소화해 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잘 어울리는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처럼 연기돌에게 가장 큰 행운은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의 옷을 입게 됐을 때다.

최근 손담비와 비슷한 사례로 영화 《엑시트》에 출연해 인생 캐릭터를 만난 임윤아가 있다. 윤아는 2007년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2009년 《신데렐라맨》, 2012년 《사랑비》에서부터는 주연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연기력에 대한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곧잘 연기를 소화해 내곤 있지만 소녀시대라는 아이돌의 후광이 너무 크게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엑시트》에서는 본인의 청순한 이미지를 깨고 강인하면서도 코믹한 캐릭터를 소화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이른바 인생 캐릭터를 만난 연기돌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배수지가 그렇다. 하지만 배수지는 그 이후에도 그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연기력 논란에 자주 오르내렸다. 영화 《도리화가》에서는 꽤 괜찮은 연기를 선보였지만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에선 다시금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이 가진 비극적 정조의 멜로를 어딘지 제대로 몰입시키지 못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배가본드》에서도 여전히 연기력 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 요원이지만 어딘지 멜로를 위해 배치한 듯한 캐릭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수지의 연기 스펙트럼이 여전히 과거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tvN 《청일전자 미쓰리》로 돌아온 이혜리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 역시 tvN 《응답하라1988》의 주인공 덕선 역할로 인생 캐릭터를 만났지만, 그 후 덕선의 이미지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청일전자 미쓰리》에서 이선심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이 캐릭터가 가진 답답함이 더해져 이혜리의 연기는 과거 덕선의 모습 그대로 비춰지고 있다.

SBS 드라마 《배가본드》에서 고해리 역을 맡은 배수지 ⓒ SBStvN 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에서 이선심 역을 맡은 이혜리 ⓒ tvN
SBS 드라마 《배가본드》에서 고해리 역을 맡은 배수지 ⓒ SBS
SBS 드라마 《배가본드》에서 고해리 역을 맡은 배수지 ⓒ SBStvN 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에서 이선심 역을 맡은 이혜리 ⓒ tvN
tvN 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에서 이선심 역을 맡은 이혜리 ⓒ tvN

연기돌에게 작품 선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

반면 인생 캐릭터를 만나고도 그 이미지를 넘어서는 또 다른 연기 스펙트럼으로 이제는 어엿한 연기자라는 호평을 받는 연기돌도 있다. 바로 임시완과 아이유다. 임시완은 《해를 품은 달》에 아역으로 출연해 주목을 받았고 2013년 영화 《변호인》과 2014년 드라마 《미생》으로 확고한 연기자의 입지를 다졌다. 군 복무 기간 동안의 휴지기가 있었지만 복귀작으로 OCN 드라마틱 시네마 《타인은 지옥이다》로 이제는 연기돌이 아닌 연기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배우로 서게 되었다.

아이유 역시 KBS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 《프로듀사》 등으로 주목받았다. tvN 《나의 아저씨》로 인생 캐릭터를 만난 후 또다시 tvN 《호텔 델루나》로 호평받으며 가수는 물론이고 연기자로서의 입지 또한 탄탄하게 쌓았다. 결국 진정한 연기자는 인생 캐릭터에 의해 만들어진다기보다는 그걸 한 번 더 뛰어넘었을 때 성취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들이다.

중요한 건 연기돌의 연기력 논란이 쏟아질 때마다 쟁점이 되곤 하는 캐릭터와 연기력의 문제다. 즉 그것이 캐릭터의 문제인가 아니면 연기력의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기력 논란은 이 두 가지가 겹쳐져서 생겨난다. 다소 연기가 부족해도 좋은 캐릭터를 만나면 연기가 살아나기도 하고, 연기를 잘해도 캐릭터가 전혀 공감이 가지 않으면 심지어 연기력 논란에도 휩싸이게 된다.

예를 들어 《배가본드》의 배수지가 연기하는 고해리는 사실 누가 해도 연기력 논란이 생겨날 가능성이 짙은 캐릭터다. 국정원 요원으로 액션의 현장 속에서 멜로를 하고 있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호평받기 어렵다. 이것은 《청일전자 미쓰리》의 이혜리가 연기하는 이선심이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의 갑질에 망하게 된 중소기업에서 말단 경리였지만 얼떨결에 사장이 된 이선심이라는 캐릭터 설정은 흥미롭지만, 드라마가 시원한 사회 풍자를 담기보다는 지나치게 무거운 현실을 끌어오다 보니 이 캐릭터는 너무나 무기력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작품과 캐릭터 자체가 답답한 상황이니 이를 어떻게 연기해도 좋은 평이 나오긴 어렵다.

연기돌은 주목받았던 인생 캐릭터에 안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이미지를 깨고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연기자들보다 훨씬 더 수혜를 받고 시작한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연기력 검증에 대한 더 엄격한 잣대가 드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스펙트럼을 넓혀가되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캐릭터에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연기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연기돌에게 작품 선정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것이 종종 연기의 성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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