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입수] 정두언 “내가 ‘벌거벗은 임금님’ 외칠 땐 아무도 듣지 않았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1 09:15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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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두언 전 의원 미공개 자서전 초고 ②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벌거숭이 임금님’에 빗댄 애니메이션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부의 안보·경제·인사 등 국정 운영 난맥상을 풍자하기 위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모욕적인 표현 방식에 비판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었다. 정치권에서 ‘벌거숭이 임금님’ 비유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이는 고(故) 정두언 전 의원이다. 정 전 의원은 시사저널이 최초 공개하는 미공개 자서전 초고에서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권력을 잡으면 ‘벌거숭이 임금님’의 프레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정치판에서 벌거숭이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고 외쳤더니 모두 자신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정 전 의원은 “내가 정치를 하면서 유난히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온 것에는 벌거숭이 임금님에 대한 과도하고 예민한 촉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데르센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은 정 전 의원에게 삶의 지침서와도 같았다. 정확히는 동화에서 어리석은 임금님을 거침없이 비웃는 아이가 정 전 의원이 바라본 자신의 모습이었다. 정 전 의원은 “어느 날 문득 내가 세상에 대해 유별나게 답답해하고 짜증을 낸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저거 순 엉터리인데,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넘어갈까? 나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괴팍한 인간이라서 그런가?’ 이런 고민을 많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더 큰 문제는 스스로 그런(비판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정두언 전 의원이 2010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정견을 발표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정두언 전 의원이 2010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정견을 발표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벌거숭이 임금님에게 ‘멋지다’ 하는 정치권”

정 전 의원이 본 정치권은 벌거숭이 임금님들의 위세가 아직도 제일 당당한 곳이었다. 벌거숭이 임금님은 재봉사가 만들어준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했지만, 사실 그의 몸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정 전 의원은 “수많은 백성이 동화에서 임금님을 향해 벌거숭이라고 손가락질한 아이와 같이 킥킥대고 있다. 역시 수많은 신하가 동화에서처럼 ‘옷이 멋지십니다’ 하며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가 세상은 필연적으로 진보한다고 했던가”라며 “동화에선 아이가 그러고 나서 어찌 되었는지를 생략했다. 미성년자이니 정도전처럼 유배는 보내지 않았으리라”고 탄식했다.

현실 속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으로 불렸지만, 이후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며 갖은 탄압과 고초를 겪었다. 대통령과 문고리 권력을 비판하는 그에게 ‘권력투쟁 한다’는 평가가 덧씌워졌다. 정 전 의원은 “너무 많은 오해를 받으며 억울해했다. 벌거숭이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고 외치는데 모두 나를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정두언 전 의원이 새누리당 의원 시절인 2016년 3월 당 공천관리위원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정두언 전 의원이 새누리당 의원 시절인 2016년 3월 당 공천관리위원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국정농단, 아무 말도 못 한 우리 모두의 책임”

보수 세력 집권을 연장한 박근혜 정부 때도 정 전 의원은 잇따른 실정(失政)에 “다들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서 ‘옷이 아름다우십니다’만 연발하고 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정 전 의원은 안타까워했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두고는 “사태가 터지고 기자들이 이야기 좀 해 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검증을 맡은 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제야 왜 이 난리들인지 어이없고 허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황당한 사태가 도대체 당사자들만의 책임일까”라며 “분명히 말하지만, 벌거벗은 임금님을 그냥 지켜보며 아무 말도 못 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했다.

 

“잘못된 공직 문화는 배신해야”

정계 입문 이후 정 전 의원은 부조리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내 편 네 편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배신자’란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 시작은 2001년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내놓으면서였다. 정 전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지난 공직 생활을 반추하며 이 책을 썼다. 대한민국 행정부와 역대 총리 등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고 대안을 제시해 화제를 모았다.

자서전 초고에서 정 전 의원은 “공직 생활 20여 년 중에 서울시 부시장 시절을 빼고는 업무 때문에 바빠본 적이 거의 없다”며 “오히려 일이 없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느라 늘 스트레스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반면교사’ 공부는 열심히 했다. 몸담은 조직과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 자세, 행태 등에 대해 ‘왜 저렇게 할까’ ‘저러면 안 되는데’ ‘나 같으면 이렇게 할 텐데’라고 자문하며 늘 일종의 가상연습, 가상훈련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과 생각을 정리한 책이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였다.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자 친정인 국무총리실에선 ‘정두언이 자기만 뜨려고 조직을 배신했다’는 소리가 떠돌았다. 직접 섭섭함을 토로하는 전 동료도 있었다.

정 전 의원은 “우리 공직 사회가 국민을 위해 좀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평소 고민해 온 점들을 정말 충정 어린 마음으로 정리해 본 것이었다”면서 자신의 진심을 모르고 배신자라 비판했던 이들에게 못다 한 말을 자서전 초고에 적었다. “국민을 배신하는 게 문제지, 잘못된 조직 문화를 배신하는 게 문제인가요? 세금을 내는 국민과 묵묵하고 성실히 일하는 많은 공직자를 위해서 잘못된 공직 문화는 배신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국회 본회의장 ⓒ 국회사진취재단
국회 본회의장 ⓒ 국회사진취재단

“정치의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의 이철희·표창원 등 이른바 ‘스타’ 초선의원들이 줄줄이 불출마 선언을 했다. 여야 모두 대화와 타협은 뒷전이고 상대를 물고 뜯는 데만 혈안이 된 상황을 비판하면서다. 말하자면 두 의원도 벌거숭이 임금님과 비슷한 거대 정당들에 동화 속 아이처럼 조소를 날린 셈이다.

정 전 의원은 생전에 누구보다 국민의 혐오를 유발하는 정치를 경계했다. 그는 이회창 총재 시절의 한나라당을 예로 들며 “한나라당에는 율사 출신을 비롯해 학자 출신, 언론인 출신, 관료 출신 등 소위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즐비했다”면서 “그들은 인재인 것은 맞지만 정치에 우수하지는 않다. 더 심하게 얘기하면 그들 중에는 정치적으론 인재가 아니라 둔재에 가까운 사람이 많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 전 의원은 “우리는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해 아무나 할 수 있고,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며 정치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정치 발전과 국격 향상에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그까짓 정치쯤이야’ 정치 혐오증 보였다”

정치인으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정두언 전 의원은 18대 국회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위시한 ‘포항 인맥’과 대립하면서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도의 전문성이 아닌 인맥 중심의 정치, 불합리한 조직 문화를 극도로 경계했던 정 전 의원은 도저히 대충 묻어갈 수 없었다. 정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이 사석에서 종종 하는 말 중에 ‘내가 그렇게 큰 기업도 수없이 만들고 운영해 봤는데 그까짓 정치쯤이야 대수겠느냐’는 식의 언급이 많았다”면서 “김영삼 정부 장관을 지낸 아무개씨가 재야 인사 시절부터 이 전 대통령과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따금 그를 만나면 정치자금을 쥐여주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전 대통령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전 대통령보다 자신이 나이가 많더라는 얘기도 했다”며 “쉽게 말해 이런 연유로 이 전 대통령 눈에 그들(정치인들)은 정치하는 건달 정도로 보였던 것이다. 그 정치 건달들이 나중에 장관 되고, 건달 왕초인 YS(김영삼), DJ(김대중)는 대통령도 되고 했으니, 이 전 대통령 생각에 정치는 그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정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의 정치가 당시 왜 그러했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당시 여의도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심지어는 정치 혐오증까지 보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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