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한반도 허리’…산불·태풍·돼지열병, 다음은?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6 17: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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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국가적 재난… ‘남북 접경委’ 설치 시급

한반도의 허리가 위태롭다. 올해만 해도 한반도를 덮친 대형 산불과 태풍,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등 국가적 재난이라 할 만한 규모의 피해가 남북 접경지역에 집중됐다. 당연히 남북이 공동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6월12일 노르웨이 오슬로포럼에서 ‘남북 접경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사람이 오가지 못하는 접경지역에서도 산불은 일어나고 병충해와 가축 전염병이 발생한다. 남북한 주민들이 분단으로 인해 겪는 구조적 폭력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접경지역의 피해부터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필요성을 인정한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전염병과 재해에는 경계가 없다”면서 “정치 문제와 별개로 접경위원회는 재난·안전·보건·의료 등 남북 주민 공동의 삶의 질 문제를 푸는 데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계속 묵묵부답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 실패 이후 꼬인 북핵 문제로 남북대화도 교착상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은 최근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 ‘남쪽 시설 철거’라는 강수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12일 오슬로포럼을 통해 “사람이 오가지 못하는 접경지역에서도 산불은 일어나고 병충해와 가축 전염병이 발생한다”며 남북 접경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6월12일 오슬로포럼을 통해 “사람이 오가지 못하는 접경지역에서도 산불은 일어나고 병충해와 가축 전염병이 발생한다”며 남북 접경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 연합뉴스

北의 계속된 비협조 ‘창조적 해법’ 절실

문제는 ‘위태로움의 반복 가능성’이다. 산불과 태풍, ASF 등이 앞으로 더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곧 산불 위험이 큰 계절이다. ASF도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문 대통령의 말(오슬로포럼)처럼 남북 간에는 지난 70년간 적대해 왔던 마음을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여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적 재난 위기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책 마련은 시급하다.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 해법’이 필요한 시점인 셈이다.

지난 4월 강원도는 최악의 산불을 겪었다. 단일 화재로는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한 강원도 산불에 정부는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총력대응을 주문하면서 “산불이 북으로 계속 번질 경우 북한 측과 협의해 진화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산불이 북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남북 접경지역에서 산불이 날 경우를 대비해 북측과 사전에 협의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고 공동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북한과 인접한 지역엔 산림청 산림항공관리소가 없어 산불의 골든타임인 30분 이내에 화재를 제압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초기 대응이 늦으면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최전선에서 복무하는 장병들의 안전도 위협받게 된다. 강원도 산불 당시 청와대는 북측과 남북연락사무소를 통해 상황을 공유하고 협력 필요성을 전달했다. 다행히 북측으로 번지지 않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접경위원회가 있었더라면 훨씬 더 체계적인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ASF 사태는 접경위원회의 필요성을 더 잘 보여준다. ASF는 치사율이 100%라 ‘돼지 흑사병’으로 불린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기 때문에 확산 우려가 크다. 북한은 지난 5월30일 ASF 발병 사실을 세계동물보건기구에 공식 보고했다. 정부는 ASF 확산 방지를 위해 남북 간 방역 협력을 거듭 제안했으나 북측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북한 평안북도의 돼지는 전멸했다고 한다. 남측에도 ASF 바이러스가 퍼졌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ASF 사태가 주는 교훈은 또 있다. ASF는 공기 전파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접촉’이 있어야 전염된다. 직접 접촉이나 매개체에 의한 접촉이 있어야 전염된다는 얘기다. 방역 당국은 역학조사를 통해 감염경로를 파악 중인데 아직까지 확실한 최초 감염원이나 매개체를 특정하지 못했다. 이를 밝혀내야 원천적인 재발 방지가 가능하다. 문제는 바이러스가 북한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다. 꼭 이번 사태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결핵, 말라리아 등 많은 전염병들이 하천이나 파리·모기 등을 통해 북측에서 남측으로 전파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 경우 남북 간 공동조사는 필수적이다. 이번 ASF 바이러스도 태풍 등의 영향으로 하천을 통해 남측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윈윈’했던 동서독 모델에서 교훈 찾아야

문 대통령이 오슬로포럼에서 접경위원회를 제안하면서 모범 사례로 제시했던 모델이 있다. 바로 동서독의 사례다. 문 대통령은 “동독과 서독은 접경지역에서 화재, 홍수, 산사태, 전염병, 병충해, 수자원 오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접경위원회를 통해 신속하게 공동 대처했다”면서 “이러한 선례가 한반도에도 적용돼 국민들 사이에서 평화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이 자라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 동서독 접경위원회는 많은 성과를 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에 따라 양국은 당시 동서독의 관계 중앙부처와 서독의 접경 4개주 대표로 구성된 ‘접경위원회’를 설치했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이들은 양국 간 경제 수준과 견해 차이 등으로 실질적 협력이 어려운 경우에는 서독이 비용을 부담하거나 기술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협력사업을 전개했다.

동서독 접경위원회의 가장 큰 성과로는 공유하천 보호와 수자원 분야 협력이 꼽힌다. 강민조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통일 이전 극도로 오염됐던 엘베강은 서독이 주도적으로 동독과의 협력을 추진해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환경이 복원됐다”고 소개했다.

한국의 그린벨트 같은 독일의 그뤼네스반트도 접경위원회의 성과물이다. 비결은 뭘까. 당시 서독은 동독에 ‘오염자 부담 원칙’을 내걸었다가 결국 비용을 부담하고 기술 이전 조건을 제시해 협력의 디딤돌을 쌓았다. 강 연구원은 “남측이 지형적으로 하류에 위치한 상황에서 수질 관리, 홍수 방지 등 남측에 이득이 되고 선제적 대응이 가능하다면 재정적·기술적 인센티브를 북측에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구상도 이와 비슷하다. 비핵화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남북 접경위원회를 통해 ‘일상을 바꾸는 적극적 평화’ 구상을 실천해 내자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국제평화지대로 변모하는 비무장지대 인근 접경지역을 국제적 경제특구로 만들어 본격적인 평화경제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유비무환’의 자세를 주문했다. 정대진 교수는 “접경위원회가 당장 가동되지 않더라도 남측에서 할 수 있는 준비, 즉 개념 연구와 기초 작업 등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제시한 ‘DMZ 국제평화지대’도 결국 한쪽이 추진하고 다른 한쪽이 추후 협력하는 모델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우리 측에서 먼저 지뢰 제거 사전준비, 하천수계 공동관리 준비 등 사전작업을 꾸준히 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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