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의 날’에 되짚게 되는 “힘을 함께 모으자” 외침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1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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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1화 - 한국·베트남의 닮은 꼴 역사, 순국열사들의 닮은 꼴 삶

베트남 역사를 살피다 보면 우리와 너무나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거쳤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무엇보다 두 나라 모두 ‘거대 제국’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다 보니 대륙의 침략과 이에 따른 외교적 노력이 필연적이었다. 예컨대 한나라 무제는 한반도에 한사군을, 베트남에는 한구군을 두었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평정한 후 안동도호부, 북베트남을 무너뜨린 뒤에는 안남도호부를 각각 설치했다. 고려와 베트남 쩐 왕조 역시 똑같이 중국의 침략에 저항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조공과 책봉 관계를 갖기도 했다. 두 나라는 또한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고 이를 무기로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싸운 경험도 함께 지녔다.

한국과 베트남의 꼭 닮은 역사는 더 있다. 바로 ‘자결 순국자’들이 줄을 이은 모습이다. 먼저 조선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시종무관장 민영환(1861~1905)이 조약 파기와 찬성파 대신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황명 거역죄가 씌워지고 옥에 갇히게 되자 울분을 토하며 칼로 배를 가르고 목을 찔렀다. 원래 그는 명성황후의 척족으로 20살 나이에 당상관에 오를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탐관오리인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의 원흉으로 몰려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되었고 그 또한 처단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 후 고종의 특사로 세계를 돌며 서구문물을 접한 민영환은 군부대신에 올라 군사 개혁을 시도하다가 모함을 받아 탄핵과 파직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의 자결이 던진 파문은 엄청났다. 백범 김구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일부는 종로 거리로 뛰쳐나와 집회를 열었는데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은 “나라에 충성치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면서 바닥에 머리를 내리 찧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출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결 도미노’ 사태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의정 대신을 지낸 조병세, 전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군인 김봉학 등이 민영환의 뒤를 이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맸다. 이로부터 한일병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50여 명이 자결 순국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충정공 민영환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묘. 오른쪽은 그가 명함에 쓴 유서
충정공 민영환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묘. 오른쪽은 그가 명함에 쓴 유서

한국과 베트남의 망국 역사에서 오버랩되는 ‘자결 순국자’들의 닮은꼴 삶

베트남에서도 항불투쟁 시기에 약 40명이 순국을 택했다. 민영환과 같은 고위관료 가운데 자결한 이로는 판탄쟌(潘淸簡, 1796-1867)을 들 수 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 편수 등을 지내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세 차례나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고도 프랑스가 침공하자 백의종군하며 최전선에 나가 싸울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 그는 세 명의 황제를 섬기며 예부상서·병부상서·추밀원대신 등을 지냈고 황제의 자문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군사적 압박으로 1862년 사이공조약을 맺고 남동부 3개 성을 빼앗겼다. 이때 판탄쟌은 사절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건너가 처음으로 서구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증기선·대포·증기기관차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귀국 후 황제에게 선진기술 도입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랑스가 다시 침공하자 그는 70살 노구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쳐 적의 선봉대를 격퇴했지만 다른 경로로 진격해 온 부대에 서부 3성이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판탄쟌은 “프랑스군 병기의 위력이 대단하니 저항했다가는 학살만 부를 것이다. 저항하지 말되 그들에게 협력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독약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판탄쟌과 민영환의 행적은 여러모로 닿아있다. 두 사람은 문관 출신으로 군대를 이끈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또 한때 좌천되거나 처단될 처지에 놓였지만 이를 딛고 일어나는 ‘오뚝이 인생’을 살기도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특사로 파견되어 서구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고, 군주에게 누차 근대화 개혁을 건의한 점도 같다. 안타깝지만 이들의 충정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닮았다. 거기에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책임을 지고 황제와 백성들에게 죽음으로 사죄한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민영환은 유서에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한다”고 적었다.

판탄쟌과 그의 묘. 오른쪽은 그가 이끈 사절단이 프랑스 나폴레옹 3세를 접견하는 모습
판탄쟌과 그의 묘. 오른쪽은 그가 이끈 사절단이 프랑스 나폴레옹 3세를 접견하는 모습

묘하게도 두 사람이 자결한 후 나라를 잃게 된 과정도 판에 박은 듯하다.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5년 뒤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베트남도 사이공조약으로 프랑스에 외교적 권리를 빼앗겼고, 그 후 남부 6개 성을 넘겨준 지 10년 만에 전국토가 식민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다 망국 시기에 두 나라 백성들이 스스로 의병을 일으킨 일도 공통점으로 빼놓을 수 없다. 그 무렵 활약한 의병장 가운데 이강년(1858년~1908)과 쯔엉 딘(1820~1864) 역시 닮은 꼴 삶을 살았다.

이강년은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지내다가 1895년 국모시해와 단발령 변란이 일어나자 경북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늑약 때 다시 봉기한 그는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일본군에게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강년은 그 무렵 일제가 새로 지은 서대문형무소의 ‘1호 순국자’로 기록되었다. 눈여겨 볼 건 그가 유생, 농민, 심지어 천민으로 취급받는 산포수 포섭에도 적극 나서 4000명에 달하는 의진을 조직한 점이다. “양반, 상놈, 노비 따지지 말고 힘을 한데 모으자”는 그의 ‘합력(合力)’ 정신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이런 정신력과 엄한 군율로 무장한 탓에 이강년 부대는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베트남의 쯔엉 딘도 프랑스군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의병장으로 꼽힌다. 지방 관리로 있던 그는 1859년 프랑스가 침략하자 수하들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유학자, 관료 및 다른 의병장들과 손잡고 급속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쯔엉 딘도 이강년과 마찬가지로 ‘합력 정신’을 내세워 6000명이 넘는 의군을 규합했던 것이다.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과 뛰어난 용병술로 승전을 거듭한 그는 지역 사령관인 ‘란 빈’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이강년이 고종에게서 ‘도체찰사’의 명을 받은 일과 겹쳐진다. 결국 두 사람이 이끈 민간 의병부대는 ‘황제의 군사’로서 봉기의 정당성을 얻게 되었던 셈이다.  

쯔엉 딘과 남부 고꽁에 있는 그의 사당. 오른쪽은 이강년과 그가 '합력 정신'을 강조한 글
쯔엉 딘과 남부 고꽁에 있는 그의 사당. 오른쪽은 이강년과 그가 '합력 정신'을 강조한 글

쯔엉 딘과 이강년 모두 침략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두 사람의 아들들 또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의병 항전을 이어가는 기개를 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우리보다 일찍 식민지배에 놓인 베트남 순국열사들의 처절한 삶은 20여 년이 지나 한반도에서 데자뷰처럼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닮은꼴은 여기까지였다. 식민지배 이후의 역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똑같이 남북 분단을 맞았지만 베트남은 미국·중국을 차례로 물리치고 통일을 이룬 반면 우리는 아직도 갈라진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 땅의 순국자들이 목숨 바쳐 희생한 의미가 빛바랜 지 이미 오래다.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을 기억하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될까. 을사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일제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조약이 체결된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한 것이다. 이들은 곡기를 끊고, 목을 매고, 머리를 부딪쳐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그래도 100여 년 전 이 땅의 지배층 중에는 “나라의 흥망이 곧 나의 책무”라는 각오로 과감하게 자결을 택한 순국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희생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백성들도 나라 지키는 데 힘을 보태지 않았겠는가. 요즘 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때일 수록 한 의병장이 외친 ‘합력 정신’이 더욱 거센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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