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시대, ‘적과의 동침’으로 위기 돌파 나선 기업들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27 10:00
  • 호수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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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간 경계 허물어지자 재계 위기의식 고조
‘합종연횡’ 통해 게임 체인저 노려

오월동주(吳越同舟). 예로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큰 바람을 만나자 평소의 적대심을 잊고 서로의 손이 되어 뭉치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그 유명한 《손자》의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유명한 고사와 달리 사실 중국의 오나라와 월나라는 ‘동주’의 처지에서 동맹을 맺었던 적이 없다. 그만큼 ‘적과의 동침’은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적과의 동침이 최근 산업계에서 연이어 포착되고 있다. 산업의 판이 뒤집히고 있기 때문이다. 5세대(5G) 이동통신,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로봇, 자율주행차 등이 미래 산업을 선도할 핵심 기술로 부상하면서 산업 간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흔히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이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기업엔 미래가 없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셈이다.

기업들이 찾아낸 솔루션은 ‘적과의 동침’이다. 죽기보다 미운 경쟁사지만, 존재 이유가 이익 추구인 기업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취하기 위해 어제의 적과 주저 없이 손을 잡고 있다. 비단 동종 기업뿐 아니라 산업 간 경계를 뛰어넘어 이종 업체들 간에도 전략적 제휴가 활발하다. 지금 신기술과 디지털 플랫폼 경쟁에서 밀리면 신성장 산업에서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은 물론 자칫 주도권마저 잃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크기 때문이다.

영원한 라이벌 같던 삼성과 애플이 협업을 강화하고, 오랜 숙적인 벤츠와 BMW가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방증이다. 제조업에 강점을 둔 한국과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과의 ‘오월동주’에 나서고 있다. 속내는 분명하다. 변화는 위기이자 기회다. 추격자였던 기업도 언제든 선도자로 올라설 수 있다. 반대로 지금 1위 기업도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 기업들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美·中 IT 패권 막자” 손잡은 이해진-손정의

11월18일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IT업체인 네이버의 자회사 라인과 소프트뱅크 자회사인 야후재팬이 AI 기반의 연합전선 구축을 공식화했다. 양사는 미국의 ‘GAFA(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와 중국의 ‘BATH(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에 맞서 검색부터 메신저, 온라인쇼핑, 금융 등에 이르는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용자 1억 명 규모의 거대 디지털 플랫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두 회사는 그동안 일본에서 모바일 간편결제 시장 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협력을 넘어 피와 살을 나누는 경영 통합을 약속했다. 네이버가 다른 상장회사와 손잡고 합작회사를 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공룡회사의 동침은 미·중 IT기업들에 맞서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미·중 IT 패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모바일과 포털을 아우르는 압도적인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의기투합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이 창업자는 지난 6월 한국사회학회·경영학회 공동 심포지엄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했다 살아남은 회사로 기억되고 싶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구글, 아마존, 텐센트, 알리바바 등 미국과 중국의 거대 플랫폼 기업들과의 싸움에서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연합군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해진·손정의 동맹의 출현은 이제는 글로벌 플랫폼 시장에서 지역 플랫폼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의 자각인 동시에,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콘텐츠-플랫폼-상거래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갖추게 되는 진정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거듭나는 ‘퀀텀점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라인은 일본에서만 8200만 명의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야후재팬은 5000만 명이 쓰는 1위 포털이다. 라인은 메신저·콘텐츠 사업에서, 야후재팬은 전자상거래(e커머스)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그리는 인터넷 제국의 지향점은 AI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들이 내건 비전은 ‘세계를 리드하는 AI 테크 컴퍼니’다. 통합 법인은 이를 위해 매년 1000억 엔(약 1조700억원)을 AI 분야에 투자한다. AI 공룡으로 거듭나고 있는 미국의 구글·아마존, 중국의 알리바바·텐센트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이를 두고 이재웅 쏘카 대표는 “최근 10년 내 한·일 사이에 일어난 경제협력 중 가장 의미가 큰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 대표는 “두 회사는 시가총액 30조원이 넘는 회사가 돼 일본 1위 인터넷 회사가 되는 것은 물론 동남아시아를 같이 공략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적과의 동침’ 현상은 특히 핀테크와 금융사 등 ICT 관련 업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과의 동침’ 현상은 특히 핀테크와 금융사 등 ICT 관련 업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통 1위 SKT-국민 메신저 카카오의 ‘동맹’

최근 국내 이동통신 1위 기업 SK텔레콤과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을 보유한 카카오가 3000억원 규모의 지분을 맞교환하는 파격적 동맹을 맺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독보적 1등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이지만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이례적인 ‘지분 동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 회사는 물고 물리는 숙적 관계를 형성해 왔다. 이동통신사의 문자서비스 수익모델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카카오다. 다른 분야에서도 살벌한 경쟁 중이다. SK텔레콤의 ‘T맵’과 카카오의 ‘카카오내비’는 내비게이션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모빌리티 시장에서는 카카오 플랫폼 택시가 타다와 함께 주요 표적이 된 사이 SK텔레콤의 ‘T맵 택시’가 반사효과를 봤다. 음악 서비스에서도 SK텔레콤의 ‘플로’와 카카오의 ‘멜론’은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그럼에도 두 회사가 손을 잡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절박함이 숨어 있다. 양사 모두 국내에서는 잘나가지만 글로벌 플랫폼 회사라는 지위에는 아직 못 미친다. 둘의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진다. SK텔레콤은 비(非)통신 분야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카카오는 카카오톡(점유율 95%)만으로는 수익 창출과 경쟁력 강화에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종합 콘텐츠 플랫폼으로 도약하는 데 서로가 필요하다. SK텔레콤은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 ‘웨이브’를 9월 출시하고 해외 진출을 준비 중이지만 콘텐츠 제작 능력이 부족하다. 반면 카카오는 웹툰, 웹소설 6만여 편 등 활용 가치가 높은 지식재산권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이병헌과 공유 등이 소속된 기획사와 제작 역량을 인정받은 영화사 등을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콘텐츠를 유통할 통로가 부족하다. 그렇게 두 회사는 통신·커머스·디지털 콘텐츠·미래 ICT 등 4개 분야에서 협력을 모색할 방침이다.

카카오는 KT, LG유플러스와도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KT는 커넥티드카 플랫폼인 ‘기가 드라이브’와 카카오모빌리티의 ‘카카오T’ 플랫폼을 결합시켜 모빌리티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LG유플러스는 카카오와 통신 단말기부터 5G 콘텐츠, 가상현실(VR) 게임, 스마트 교통까지 여러 영역에서 협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적과의 동침’ 현상은 전 산업 영역에서 진행 중이지만 특히 ICT 관련 업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형 카드사들이 최근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토스’ 등 핀테크 업체와 손잡고 비대면 영업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 대표 사례다. ‘간편 송금’이라는 서비스의 차별성이 떨어진 토스와 마케팅 비용을 줄여야 하는 카드사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토스는 금융사·카드사들의 마케팅을 대신해 주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카드사들은 토스를 통해 각종 규제를 우회하고 있다.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르면 신용카드 발급과 관련해 오프라인은 연회비의 10% 초과, 온라인은 연회비의 100%가 넘는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토스는 전자금융업자로 분류돼 있어 여신전문금융업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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