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조상 되지 말자” 다짐 또 다짐했던 광복군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9.11.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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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광복군’ 6000리 대장정 취재기 ①…中 서주에서 중경까지
중국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전경 ⓒ 오종탁 기자
중국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전경 ⓒ 시사저널 오종탁

“이런 데서 목숨을 건졌으니, 신이 살려주셨다고 할 수밖에.”

탄성과 탄식이 번갈아 터져 나왔다. 탄성은 애국심과 용기에 대한 찬사였고, 탄식은 수많은 젊은이를 사지(死地)로 보내야 했던 조국을 향한 것이었다.

독립유공자 후손 19명과 일반시민 14명이 11월13일부터 19일까지 중국에서 청년 광복군들의 흔적을 따라갔다. 중국 서주 주둔 일본군 부대를 목숨 걸고 탈출한 조선인 학도병 무리가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행군해 광복군으로 거듭났던 길이다. 중국 임천, 남양, 노하구, 신농가 등을 거쳤고 거리는 6000리(약 2356km)에 이른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단체로 이 루트를 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과 동행한 시사저널은 역사적인 탐방 현장 취재기를 2회에 걸쳐 보도한다. 이번 탐방을 주최한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는 고(故) 장준하 선생이 1971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항일 장정 회고록 《돌베개》에 근거해 일정을 짰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징집돼 중국 서주에 배치됐던 장준하 선생은 탈출해 광복군이 됐다.

1944년 7월7일 쓰카다부대 탈영해 광복군행

33인의 탐방대는 75년 전을 상상하며 장 선생 등 학도병이 복무했던 일본 쓰카다부대 터부터 찾았다. 지금은 중국 인민군(공정병지휘학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외졌던 이곳도 중국의 부동산 개발이 본격화하며 많이 바뀌었다. 바로 앞 대로변엔 차와 오토바이가 쌩쌩 달리고 건너편엔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쓰카다부대 학도병 장준하·김영록·윤경빈·홍석훈 선생은 1944년 7월7일 탈영을 감행한다. 이날은 중·일 전쟁 발발 7주년 기념일이었다. 일왕이 하사한 술과 음식으로 부대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철조망을 넘었다. 항일 의식과 조국 광복에의 열망이 폭발한 결과였다. 이날 밤 장 선생 일행은 돌산을 넘어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으나, 곧 길을 잃고 만다. 만 하루를 헤매다 친(親)일본 성향의 중국 군벌 왕정위군의 추격을 받는다. 김영록 선생이 낙오하는 등 위기를 겪다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유격대에서 이들은 함께 장정에 오르게 될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을 만난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이 머물렀던 불로하 앞에서 장호권 광복회 서울시지부장이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
중국 서주 주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학도병들이 머물렀던 불로하 앞에서 장호권 광복회 서울시지부장이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장 지부장은 학도병들을 이끈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장남이다. ⓒ 시사저널 오종탁

쓰카다부대 터를 떠나 버스로 30여 분 달리자 과거 중국 유격대 군영 앞에 있던 불로하가 나타났다. 장 선생 일행은 이 불로하에 뛰어들어 몸과 마음을 씻었다. 함께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불로하 주변은 강산이 일곱 번 변한 지금도 여전히 척박했다. 탐방대는 학도병들의 발자취를 느껴보려 애썼다.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장은 불로하를 바라보며 “이국땅의 이렇게 험한 지대에서 살아남았으니, 나라를 딱하게 생각한 신이 살려주셨다고밖에 할 수 없겠다”고 읊조렸다. 옆에 있던 황근하 광복회 서울시 동작구지회장과 장 지부장이 불로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황 지회장의 아버지 황갑수 선생도 광복군이었다. 장 선생 일행은 아니었지만, 역시 중국의 일본군 부대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청년 광복군의 아들들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이 됐다.

임시정부 향해 하루 39km 걸어

탐방대의 다음 행선지는 한국인들에겐 이름도 생소한 중국 임천이다. 1944년 8월 임천에 도착한 장 선생 일행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에 입소했다. 한광반이 훈련받았던 연병장은 현재 임천제4중학교 학생들이 뛰노는 운동장으로 바뀌어 있다. 학생들은 갑자기 학교를 찾은 한국인 무리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관광지도 아닌 시골 마을에 외국인이 방문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기 때문이다. 탐방대가 건넨 태극기 문양 휴대전화 고리를 받아든 학생들은 해맑게 웃었다. 한광반에서 숨을 돌렸던 학도병들처럼 탐방대도 잠시 여유를 즐겼다. 

지금은 중학교가 들어선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훈련반 터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등 탐방대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
지금은 중학교가 들어선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한국광복군훈련반 터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등 탐방대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

한광반의 군사교육은 나라 없는 민족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목총 한 자루도 없이 사실상 시간 보내기만 했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결국 장 선생 일행은 3개월 만에 임천을 떠나 중경 임시정부로 향했다. 한광반을 수료하면서 중국군 준위 계급장을 받은 상태였다. 4명으로 출발한 장 선생 무리는 53명이 됐다. 이들은 일본군 보급로로 활용되던 평한선을 건너 남양을 향해 행군했다. 《돌베개》에서 장 선생은 하루 평균 100리(약 39km)를 걸었다고 회상했다. 나그넷길에 식사와 잠자리가 성할 리 없었다. 옴에 걸려 고생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장 선생 일행이 힘들게 도착한 중국 중앙군 남양전구사령부는 열악했다. 보급품이 충분히 확보돼 있지 않아 장 선생 일행은 인근 부락에서 방을 빌려 2주간 묵었다. 매일같이 남양전구사령부에 찾아가 독촉한 끝에 동복, 외투 등 보급품을 받아냈다. 권태운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 탐방대원들에게 “장 선생 일행이 중국군 준위 계급이었기에 어렵게나마 보급품을 요청해 확보할 수 있었다. 김준엽 선생을 중심으로 중국군과 타협을 잘 이뤘고, 이것이 항일 장정을 지속하는 하나의 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보급품을 받아 남양전구사령부를 떠난 장 선생 일행은 사흘 만에 노하구에 닿았다. 노하구에는 광복군 제1지대의 분견대가 있었다. 분견대의 인원은 3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당초 장 선생 일행이 중경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비행기·배편 등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다 돌연 태도가 바뀌었다. 노하구에 계속 머무르며 제1지대를 보강하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알고 보니 이들은 김원봉 중경 임시정부 군무부장 휘하에 있었다. 공산당 노선을 취하고 있던 김 군무부장이 장 선생 일행의 중경행을 막고,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려 접근해 온 것이다. 장 선생 일행은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장준하 선생 치료했던 병원 터는 출입 제한돼

막상 독자적으로 떠나려니 노자, 식량 등 현실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당장 험준한 파촉령이 앞을 가로막았다. 장 선생 일행이 신은 짚신으로 하늘 나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장 선생 일행은 또다시 김준엽 선생을 앞세워 중국군 제5전구사령부인 이종인 부대와 노자 마련을 위해 접촉했다. 이어 이종인 부대의 종용 아래 현지 학생들의 학도병 지원을 장려하는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장 선생 일행은 연극 등 연예 프로그램을 연일 무대에 올렸다. 특히 연극은 중·고등학생을 넘어 시민 전체의 화제로 번졌다. 권태운 사무총장은 “요즘의 한류 스타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이라며 웃었다. 

이종인 부대 역사박물관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인 노영탁 광복회 서울시 강북구지회장(고 노백린 애국지사 손자)이 사진을 찍고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
이종인 부대 역사박물관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인 노영탁 광복회 서울시 강북구지회장(고 노백린 애국지사 손자)이 사진을 찍고 있다. ⓒ 시사저널 오종탁

장 선생 일행의 인기가 워낙 높자 이종인 부대 정훈참모는 시민회관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공연의 막이 내려올 때 연극을 연출한 장 선생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간 너무 무리한 탓이다. 동료들은 장 선생을 데리고 몇 곳의 병원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복민병원에서 겨우 의사를 만났다. 탐방대가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한참 지난 끝에 도착한 복민병원 터는 출입이 제한돼 있었다. 인근의 이종인 부대 역사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 탐방대는 전시관에서 복민병원 사진을 보고 아쉬움을 달랬다. 장 선생 일행은 연예 프로그램으로 고생한 끝에 충분한 노자를 확보했다. 수입은 공평히 분배했고 양말과 가죽구두를 한 켤레씩 사서 파촉령 등반 채비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파촉령은 관광지로 개발

이제 장 선생 일행의 장정도, 탐방대의 답사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장 선생 일행이 넘었던 파촉령에 탐방대가 도착했다. 이곳은 현재 ‘신농가’로 불린다. 빼어난 경관과 보존 가치를 지녀 중국 내 유일한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 3관왕’(세계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세계자연유산) 지역이다. 중국 정부의 통제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불과 5년여 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신농가에서 탐방대는 기암괴석이 펼쳐진 판벽암과 해발 3106m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신농정 등을 돌아봤다. 탐방대의 일원이자 한성여고 1학년에 재학 중인 이가빈양은 “버스로 오기도 힘든 높고 험한 산길을 장 선생 일행은 한겨울에 걸어서 넘었다는 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청년 광복군들이 중경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한겨울에 넘어야 했던 파촉령 ⓒ 시사저널 오종탁
청년 광복군들이 중경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한겨울에 넘어야 했던 파촉령 ⓒ 시사저널 오종탁

생사를 넘나들며 눈 덮인 파촉령을 넘은 장 선생 일행은 마침내 양자강 지류가 흐르는 평지에 이르렀다. 노하구를 떠난 지 13일 만이었다. 파동으로 이동한 일행은 중경행 배에 올랐다. 육로 대장정의 끝이었다. 배를 탄 지 8일 만에 꿈에 그리던 중경에 도착했다. 1945년 1월31일 장 선생 일행은 중경의 임시정부 청사 앞뜰에서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인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환영 모임에서 김 주석의 환영사에 이어 장 선생의 답사가 이어졌다. 답사 중 김 주석은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장내는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탐방 마지막 날 중경 임시정부를 찾은 탐방대원들은 숙연해졌다. 흐린 날씨 속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건 청년들의 6000리 행군. 그리고 그들의 숨결을 따라온 후손 33명이 같은 자리에 섰다. 임시정부 계단에 선 우덕희 독립운동해설사는 “장 선생 일행은 고비를 넘길 때마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제 우리가 다음 세대에 대해 의무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라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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