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즉위 종교의식’ 반대 목소리 잦아든 까닭
  • 류애림 일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03 16:00
  • 호수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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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사이’ 비판 불구, 상왕에 대한 우호적 이미지 한몫해

어둠이 내린 도쿄 고쿄(皇居). 흰색 전통복장을 한 일왕이 왕비와 함께 횃불에 의지해 걷는다.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의식을 위해 이동하는 이 모습이 전부며, 이후 의식은 모두 비공개로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 

11월14일 밤부터 15일 새벽에 걸쳐 ‘다이조큐(大嘗宮·대상궁)의 의식’이 열렸다. 일본의 왕위 계승 행사인 ‘다이조사이(大嘗祭·대상제)’의 중심 행사다. 7세기 후반부터 매년 일왕이 햇곡식을 천지의 신에게 바치고 직접 먹기도 하며 그해 수확을 감사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니이나메사이(新嘗祭·신상제)’라고 한다. 현재는 11월23일 열리고 있고 ‘노동 감사의 날’로 공휴일이기도 하다. 이 니이나메사이와 구분되는 다이조사이는 일왕이 즉위하는 해에 열리는 의식이다. 햇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니이나메사이와 다르지 않지만,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더해진다. 

나루히토 일왕이 11월14일 대상제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다. ⓒ 연합뉴스
나루히토 일왕이 11월14일 대상제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다. ⓒ 연합뉴스

다이조사이 의식에 쓴 세금만 263억원

다이조사이는 종교적 의식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민속학자 중 한 명인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1887~1953)는 다이조사이 의식을 전대(前代) 일왕의 혼이 새로 즉위하는 일왕의 몸으로 들어가 진정한 일왕이 되는, 주술적인 의미를 품은 과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후지모리 가오루 고쿠시칸대학 교수의 경우는 일왕의 조상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제사 지내고 평화와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종교적 의미의 행사다. 

의식은 해가 진 저녁 6시부터 시작해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이루어진다. 후지모리 교수는 주간 아사히에서 이 심야 의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즉위를 선언하는 ‘즉위례 정전(正殿)의 의식’은 정치적인 의식이기에 낮에 열린다. 한편 신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은 예로부터 밤에 이루어졌다. 다이조사이와 니이나메사이가 진행되는 시각은 귀신이 나오는 축시에 해당한다.” 어느 지방의 햇곡식을 의식에 사용할지도 거북껍데기를 이용하는 거북점을 통해 정한다. 

이와 같은 다이조사이의 종교적 의미 때문에 이 의식을 반대하는 일본인도 많다. 지바(千葉)현에 거주 중인 목사는 “천황가가 어떤 종교를 믿는가는 자유다. 그러나 그 종교 행위가 국민의 세금을 사용해 이루어지면 크리스트교 신자인 내가 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돼 신앙의 양심에 반(反)하게 된다”며 국민의 세금 투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아사히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실제 다이조사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데, 이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이번 레이와(令和)의 다이조사이를 위해 투입된 국비는 약 24억4000만 엔(약 263억원)이다. 또 지방자치단체의 수장 등이 의식에 참가하는데 이와 같은 것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는 일본 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다이조사이에 반대하고 있다. 

다이조사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일찍이 소송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번번이 반대 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7년의 최고재판소 대법정에서는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은 국가가 종교의 관계를 완전히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한도를 넘었을 경우에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이 판결에 기초해 다이조사이에 국비를 지원하고 있다.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다이조사이에 반대하는 집회도 열렸다. 다이조사이가 열린 11월14일 밤, 오사카에서는 “다이조사이는 위헌”이라며 약 160명이 모인 시민집회가 열렸고, 도쿄역 앞 광장에서도 반대집회가 열렸다. 도쿄역 앞의 집회를 주최한 남성은 “단 하룻밤 의식을 위해 세금을 사용하고 거대한 신전을 지었다”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헤이세이(平成)의 다이조사이에 비하면 반대 목소리는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전대 헤이세이 일왕의 다이조사이가 열린 1990년 11월 당시에는 일본 각지에서 반대 움직임이 격렬했다. ‘천황제’ 자체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교토에서는 과격파의 동시다발적인 게릴라 사건이 일어났고, 화제로 전소한 신사도 발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열리는 다이조사이였다. 1947년 시행된 일본국헌법은 20조에 정교분리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때 함께 만들어진 새로운 황실전범에서는 ‘다이조사이’가 삭제됐다. ‘천황제’가 근대 메이지(明治) 정부가 만들어낸 새로운 전통이라는 의식, 천황제가 전쟁의 책임과 무관하다는 의식이 여전히 강했던 때, 전후 첫 다이조사이는 격렬한 비판에 부딪혔다. 

 

日 정부 “종교의식이지만, 공적 성격 있다”

이번 레이와 다이조사이와 헤이세이 다이조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와 같은 반대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일본 근현대사 전문가인 도미나가 노조무 교토대학 조교(우리나라 조교수에 해당)는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반대 세력이 힘을 잃은 이유를 “상왕(헤이세이 일왕)이 왕좌에 있으면서 일본 국민에 다가가는 노력을 했고 ‘상징’으로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후 일본 헌법은 ‘상징’으로서 일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존재로 활동해 정치와 거리를 둠으로써 천황제 반대 세력의 우려를 많은 부분 덜어냈다는 것이다. 또 ‘전통’에 현혹되어 다이조사이의 의미에 대한 고찰 없이 무조건 수용하게 된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는 지적도 있다. 

전후 두 번의 다이조사이 모두 충분한 논의 없이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는 1989년 쇼와 일왕의 죽음으로 헤이세이의 다이조사이를 발표했을 때, 그에 대한 비판이 일자 “종교의식으로서의 성격은 가지나, 공적 성격이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 입장을 아직까지도 고수하며 국비의 지출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반대 주장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법률적 근거가 없음에도 전통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는 다이조사이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년 전, 일왕의 동생 후미히토(文仁) 친왕은 의식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보이며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일왕가의 사적 생활비에서 의식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발언을 계기로 일왕가의 정치적 발언 범위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졌지만 다이조사이 비용에 관한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논의 없이 반복되는 의식은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를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며 열린 토론을 통해 일본 국민의 합의를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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