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안의 노숙자를 밖으로 끌어내 죽게 만든 철도청 직원, 죄가 될까
  • 남기엽 변호사 (kyn.attorney@gmail.com)
  • 승인 2019.12.0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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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엽 변호사의 뜻밖의 유죄, 상식 밖의 무죄] 20회
혹한기에 노숙자를 밖으로 끌어내 죽게 만든 철도청 직원의 행동, 죄가 되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개인의 인권보다 중요한가?”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춘추전국시대 때 망명한 위만이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위를 차지했던 때보다 200~300년 전의 일이다.

이 말 한 마디로 인권의 역사성을 조망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소포클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가 노예제였다는 사실은 되레 인권차별의 역사성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다루는 인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연법, 천부인권, 시민의 권리 등의 보편성은 마치 이러한 가치들이 문명사와 함께해 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굳이 기원을 찾자면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정도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인권의 핵심 중의 핵심은 주지하다시피 생명권이다.

생명권은 그 자체로 사회적 평가를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한 생명이란 없다. 굳이 찾자면 악질 범죄자의 생명권 정도이고 헌법재판소 역시 사형제를 인정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생명에 우리는 얼마만큼 존중을 보여야 하는가. 존중이 곧 타인의 생명을 구조하는 것이고, 그러한 모든 생명이 평등하며 생명의 절대적 성격을 인정한다면, 시민에게 타인의 생명 구조의무를 강제할 수 있는가. 혹한기에 길에 쓰러진 할머니를 보고 119 전화를 하는 정도의 수고를 법적 강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진부한 만큼 부진한 논의가 있다. 그리고 여기, 정면으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례가 있다.

서울역은 시청역, 영등포역과 더불어 단골 노숙지다. 밤만 되면 많은 노숙자들이 모여 자리를 깔고 잠을 청하는데 역사 측은 이를 묵인할 수 없다. 그래서 최소한의 구역을 정하고, 때로는 시민들을 위해 그 구역을 변경하며 노숙자들을 내보낸다. 과거에는 노숙자가 술에 취해 소주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면 2, 3명의 공안 ‘결사대’가 즉각 투입돼 강제로 쫓아냈지만 사건사고가 일어나며 그럴 수도 없게 됐다.

노숙자 A는 그런 구역 변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울역 2층 대합실에 잠이 들었다. 술에 취해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으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해가 뜨기도 전인 한겨울 오전 7시, 철도청 직원은 A를 발견한 뒤 공익을 위해 근무하는 요원에게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둘 모두 A가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알 턱이 없었다.

문제는 당시 날씨. 영하 6.5도(체감온도 영하 9.7도)의 날씨는 보통의 건강한 사람이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 혹한(酷寒)이다. 공익요원은 A를 출구 앞 대리석 바닥에 놓았고 다른 공익요원은 제설작업을 위해 A를 휠체어에 태운 뒤 서울역사 구름다리 아래로 옮겼다. A는 4시간 뒤 숨졌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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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청 직원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검사는 철도청 직원 및 공익요원인 이들에게 국민의 신체 건강을 보호하고 구조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가 있다고 보아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이들에게 철도역사 직원과 공익요원으로서 국민의 신체 건강을 침해하지 않아야 할 의무는 있다”면서도 “구조를 요하는 사람을 구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다고 법원이 이들의 행동을 긍정한 것은 아니다. 법원은 “고인이 된 노숙자는 이들의 적극적 구호조치가 있었다면 살았을 것”이라며 “법률적 의무가 없어 형사 책임을 물을 순 없지만 도덕적 비난을 면할 수는 없다”고 짚었다. 다만, 불행한 결과가 있을 때마다 형사책임을 물어 단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에서 인권의 기원을 ‘동정’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고문이 종식된 이유는 법원이 그것을 포기했거나 계몽사상가들이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격에 대한 세계관의 전환이 타인에 대한 고통을 ‘동정’하게 했고 고문당하는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동일시했다. 이는 인권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의 자유 등장의 촉매가 됐다.

그렇다면 갈비뼈 골절 사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혹한기에 휠체어에 태워 놔두고 가는 그 엄혹(嚴酷)에 대한 동정은 인권이라는 차원으로 강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계급, 인종 그리고 성별을 초월한 ‘동정’의 인식론을 어디까지 확장시켜야 하는가.

이 진부한 물음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생명 존엄성을 상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생명권을 어디까지 동정해야 하며, 그 법적 경계선을 어디까지 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틀로의 대체를 요구한다. 동정심은, 어디까지 발휘되어야 하고 또 인정되어야‘만’ 하는가.

혹한기에 노숙자를 밖으로 끌어내 죽게 만든 철도청 직원의 행동, 죄가 되지 않는다.

 

남기엽 변호사대법원 국선변호인남부지방법원 국선변호인서울지방변호사회 공보위원서울지방변호사회 형사당직변호사
남기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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