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反트럼프] 마크롱의 승부수 “美 주도 나토 필요없다”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8 10:00
  • 호수 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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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맞짱’ 뜨는 프랑스 대통령, ‘나토’ 용도 변경하고 ‘팍스 유럽’ 꿈꾸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존재감이 한껏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국 내에서의 인기가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대립각을 통해서다. 12월3일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이 런던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그러나 3개월여 전 G7 회담장에서 보였던 둘 간의 돈독했던 관계는 온데간데없이, 시종일관 이견을 나타내며 충돌했다. 이날 두 정상이 함께한 이유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는 줄곧 축하의 ‘덕담’이 아닌 나토의 존폐를 위협하는 설전이 이어졌다.

12월3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나토 정상회의 환영 리셉션장에서 영국의 앤 공주(앞, 이하 시계방향),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 등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 모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험담을 나눴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PPA 연합
12월3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나토 정상회의 환영 리셉션장에서 영국의 앤 공주(앞, 이하 시계방향),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 등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 모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험담을 나눴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PPA 연합

“더 이상 트럼프에 맞출 필요 없다 생각”

첫 번째 파열음은 역시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공세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 분담’이라는 분명한 수치를 제시하며 나토 회원국을 압박한 것은 물론, 2%를 ‘준수’한 국가수반들을 따로 불러 만찬을 갖는 등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차원의 ‘노골적 외교’를 선보였다. 이에 마크롱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마치 독일·영국 등 다른 유럽 동맹국들을 대신해 총대를 메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는 이로 맞서겠다는 듯 험한 말로 유명한 트럼프 못지않게 마크롱 또한 직설적이고 강경한 발언을 이어갔다. 나토 70돌을 한 달여 앞둔 지난 11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토를 두고 “뇌사 상태”라고 표현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나토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며 즉각적으로 진화에 나섰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강경 발언이었다. 마크롱 발언에 대한 반발은 터키에서도 터져 나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마크롱 대통령의 뇌 상태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맞받은 것이다. 프랑스 외무부는 이튿날 터키 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강한 충돌이 돌발적이거나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한 것은 2017년부터였다. 마크롱이 자신의 강한 표현을 두고 “번복할 생각이 없다”고 못 박은 것 역시 그가 이미 2017년 집권 직후부터 나토는 물론 유럽연합의 부흥을 외쳐왔기 때문이다. 즉 이번 발언은 나토에 대한 회원국의 각성을 촉구하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트럼프와는 상관없이 유럽의 독자적인 자주권 획득이라는 마크롱의 새로운 로드맵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마크롱은 트럼프에 맞춰왔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인식한 것 같다.” 파리 국제전략연구소(IRIS) 소장인 파스칼 보나파스의 지적이다. 최근 나타난 마크롱의 행보에 대한 설명이다. 나토의 존폐 문제, 즉 존재 이유에 대한 우려 역시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주원인은 ‘주적’의 문제다. 나토는 애초부터 러시아를 위시한 공산권을 상대로 만들어진 군사동맹이다. 따라서 구소련 해체 후 상대할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나토를 흔들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의 변화다. ‘국제경찰’을 자임하며 유럽 수호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미국이 지난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유럽의 자립을 강조하며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수익 명세서’와 계산기를 들고 등장한 트럼프와 함께 가속화됐다.

그렇다면 나토에 대한 마크롱의 생각은 무엇일까. 이번 방위비 분담금 실랑이 와중에 트럼프는 “그 누구보다 나토를 필요로 하는 것은 프랑스”라고 콕 집어 말했다. 재정적 불만에서 나온 볼멘소리였지만, 이런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11월28일 70돌을 맞은 나토군의 총사령관인 예센 스톨텐베르그를 접견한 자리에서 마크롱은 나토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말리에 파견된 프랑스군 13명이 헬기 충돌로 순직한 사고 이튿날이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군대를 파병 중인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나토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도널드 투스크 전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트럼프 대통령 뒤에서 ‘손가락 총’을 겨냥한 듯한 사진을 올렸다.
도널드 투스크 전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트럼프 대통령 뒤에서 ‘손가락 총’을 겨냥한 듯한 사진을 올렸다.

드골 장군의 ‘유럽인에 의한 유럽’ 데자뷔

같은 자리에서 마크롱은 “러시아가 우리의 주적인가”라고 반문하며 “우리의 주적은 테러리즘”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주적이 사라진 나토의 존립 이유를 ‘대테러’라는 새로운 미션으로 설정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 변경에 대한 군사 전문가들의 시각은 회의적이다. 나토는 대테러 작전이 아닌 국가 간 방어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마크롱이 공개적으로 나토의 지원을 요구했지만, 나토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지난 7월14일 파리 혁명기념일에 이루어진 군사 퍼레이드에 주빈으로 초대된 것은 그 어느 나라도 아닌 ‘유럽 주도 이니셔티브’, 즉 새로이 창립된 ‘신속 대응 부대(불어식 약칭 IEI, 영어식 약칭 EI2)’였다. 2017년 마크롱이 설립을 주도했으며,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10개국이 참여했다. 이들은 현재 130억 유로(약 17조2000억원) 규모의 자체 기금까지 마련했다. ‘유럽방위기금’으로 명명된 이 기금은 미국의 접근을 막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 5월22일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은 대정부 질문에서 “지금까지 유럽연합은 자주적 방어를 위해 단 1유로도 투자한 적이 없다”고 일갈한 뒤, 유럽방위기금을 통해 유럽 군수업체 기술개발은 물론 일자리 창출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실제로 지난 7월 세계 최대 규모의 파리 에어쇼에선 유럽이 공동 제작하고 있는 전투기의 모형이 공개되기도 했다.

프랑스 육군대장 출신의 군사 전문가인 뱅상 데스폭 장군은 마크롱의 이번 ‘뇌사 발언’을 두고 “통찰력 있고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치켜세웠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마크롱이 지적했다는 것이다. 과연 마크롱이 화려한 외교술과 새로운 리더십으로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으로 대통령에까지 오른 샤를 드골 장군은 집권 중이던 1966년 나토 통합군에서 전격 탈퇴한 바 있다. 이유는 미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외교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드골 장군의 꿈은 ‘유럽인에 의한 유럽’이었다. 드골 장군이 못다 이룬 꿈을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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