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새로운 길’] “김정은, 당장 파국 몰고 갈 가능성 낮다”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6 10:00
  • 호수 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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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분석하는 북한의 ‘새로운 길’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월7일 오전 11시부터 30분 동안 전화통화를 갖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켜 나갈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날 통화는 미국 측 요청에 따라 진행됐는데, 이는 최근 한·미 관계에서 꽤 이례적인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해답이 나온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 런던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12월3일 기자회견에서 느닷없이 “필요하다면 북한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인 2017년 하반기에나 나올 화법이다. 당연히 북한은 즉각 반응했다. 이튿날 북한은 군 서열 2위 박정천 총참모장의 담화를 통해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대응하겠다”고 경고했으며,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도 12월5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늙다리의 망령”이라고 비난하며 “그의 발언이 의도적으로 계획된 도발이라면 우리 역시 미국에 맞대응 폭언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그로부터 북한은 연일 말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북한의 다자외교 채널인 유엔 대사를 맡고 있는 김성은 주말 성명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지속적이며 실질적인 대화’는 국내 정치적 어젠다로서 북·미 대화를 편의주의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시간 벌기 속임수”라고 주장했다. 곧장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 북한이 영향을 주는 것을 경고하는 발언을 하자 12월9일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은 개인 명의 담화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참을성을 잃은 늙은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은 “최근 트럼프의 발언과 표현들은 얼핏 누구에 대한 위협처럼 들리지만 심리적으로 그가 겁을 먹었다는 뚜렷한 방증”이라고 응수했다. 김영철은 하노이 회담 이후 대미 협상 테이블에서 물러났고 리수용은 미국을 제외한 아프리카, 남미 등 다자외교 쪽을 총괄하고 있어 협상의 책임자는 아니다. 하지만 북한 실무진과 트럼프 대통령의 설전으로 한반도 평화에 커다란 먹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7월3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형 대구경조종방사포 시험사격’을 참관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월3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형 대구경조종방사포 시험사격’을 참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정은, 매번 백두산 등정 후 큰 결심

한·미 양국이 북한의 최근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까닭은 최근 나오고 있는 징후들이 심상치 않아서다. 12월4일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백두산행’을 밝히며 63장의 사진을 함께 공개했다. 북한 내에서 김 위원장이 백두산에 오르는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김 위원장은 첫눈이 내린 10월15일 백두산을 다녀와서는 금강산에 있는 남측 관광시설의 철거를 요구한 바 있다. 스톡홀름에서 진행된 북·미 실무회담이 결렬된 지 10여 일이 지난 때였다. 2013년 11월에도 김 위원장은 백두산에 다녀온 뒤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숙청했다. 2017년 12월 등정 후에는 남북관계와 북·미 협상의 동시 진행을 지시한 바 있다. 최근 북한이 이달 하순경 노동당 전원회의 개최를 예고했다는 점에서 등정 이후의 행보가 더욱 주목받는다.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미국과 북한 두 정상이 만났을 때만 해도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미약하나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에서 이런 기대는 한 번에 어긋났다.

군사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정을 내건 북한의 제안에 미국이 싱가포르에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북한은 하노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경제제재 해제와 영변 핵 카드를 맞바꾸자고 제안한 것이다. 대미 협상 전략의 주제가 안보에서 경제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하노이에서 제재 해제를 거부하자 북한은 다시 체제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김 위원장이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1차 대의원회의 시정연설에서 “더 이상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그 방증이다.

제재 해제가 급박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은 중국의 간접지원으로 급한 불을 껐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은 원산갈마지구 등 관광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관광은 유엔 대북제재에서도 비켜나 있는 중요한 외화벌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관광정책은 정부의 입김이 강하다. 특정 국가로 못 가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독려할 수도 있다.

올 6월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은 짧은 만남을 가져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 톱다운 형식의 회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은 북한은 확실히 협상 스타일을 바꾼 모습이다. 베트남 대사였던 김명길을 협상대표로 내세운 북한은 10월5일 유럽 외교의 핵심인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15분 만에 결렬을 선언했다. 김명길 협상대표는 당시 “구태의연한 입장과 태도를 버리지 못한 채 빈손으로 나왔다”며 “매우 불쾌하다”고 말했다. 미국이 밝힌 ‘창의적 아이디어’와는 차이가 난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미국은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를 취하면 막연하게 생존권·발전권 등 상응조치를 내놓겠다고 한 것 같은데, 이는 ‘체제 안전 보장’이 최우선 과제인 북한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친 수준”이라고 결렬 배경을 설명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도 10월14일 “미국은 영변 핵시설의 검증 가능한 폐쇄와 우라늄 농축 종료를 요구했으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외에 석탄·섬유류 수출의 36개월 유예 등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선 신뢰 조치를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한·미 연합훈련을 재개하고 전략자산을 남한으로 꾸준히 배치했으며 싱가포르 회담 이후 15차례에 걸쳐 추가 대북제재를 한 것에 대해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올 연말은 한반도 정세에 매우 중요한 시기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 신년사에서 “미국이 제재, 압박을 지속한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올 하반기부터 북한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미국의 제재, 압박이 여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말하는 새로운 길이란 무엇일까. 국내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2017년과 같은 긴장 관계로 들어갈 가능성은 일단 높지 않다고 본다. 한·미 양국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북한이 대화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 다시 핵실험에 나서는 것이다.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지난해 5월 김 위원장의 중국 대련 방중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파국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기 때문에 레드라인(핵실험)을 넘어서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30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함께 북으로 갔다 다시 남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30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함께 북으로 갔다 다시 남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북·미 대결 구도, 장기전 돌입할 가능성 있어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신형 잠수함에서 전략무기인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이 민감해하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보다는 SLBM 시험으로 수위를 조절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분석이다. 북한은 올 10월 SLBM인 북극성 3호를 시험 발사했는데 이후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11월27일자에서 “북극성 3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의 국가핵무력은 이미 미국 본토 전체를 안에 두고 있으며, 그 완성도는 높다”고 주장했다.

ICBM 시험 발사로 긴장 관계를 다시 끌어올릴 수도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12월8일 북한 국방과학원 대변인 발표를 통해 “12월7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험이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이 ICBM용 고체연료 엔진의 연소 시험을 했을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는 미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이다. ICBM에 고체연료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연료 주입부터 발사까지 걸리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SLBM 개발도 미국으로선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잠수함의 특성상 어디서 미사일을 발사할지 알 수가 없다. 이상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사는 “북한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우리 정부에 재래식 전력 감축을 요구할 수 있다”면서 “우리가 최근 신무기를 도입하고 개발하는 것도 군사분야 합의서를 위배했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리하면 한반도 시나리오는 총 3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 재선을 앞두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통 큰 결단을 내려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개설 등 체제를 인정하는 카드를 제시하는 것이다. 올 연말 전원회의 또는 내년 김 위원장의 신년사를 통해 북한이 강경 노선에 돌입하더라도 북·미 간 물밑협상을 통해 내년 상반기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여는 방안이다.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은 가장 낮지만, 북·미 대화를 더욱 강하게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다.

두 번째, 북한이 경제·핵 병진노선으로 회귀해 한반도가 다시 대결구도로 가는 것이다. 북한이 ICBM을 시험 발사하거나 핵실험 재개에 나서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북·미 관계는 더욱 꼬일 수 있다.

세 번째는 장기전이다. 북한은 대선일이 임박할수록 지금의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외교적 성과로 미국을 향한 위기가 줄어들었다며 1차 대북 협상의 성과를 자랑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재선 이후 본격적인 협상에 나서는 것이다.

 

文 정부, 北·美 모두에게 외면받나

그런데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일단 북한은 새로운 길의 시한을 올해 말로 정해 놓고 있는 반면, 미국은 연내 협상을 타결 짓는 것이 정치적으로 볼 때 큰 이득이 없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희망 시간대가 다르다는 뜻이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10월24일 평화재단 제79차 전문가포럼에 나와 “북한은 핵 보유국 상태에서 중국·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내년에는 남한에서 국회의원 총선이 열리고 일본은 도쿄올림픽, 미국은 대선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비핵화 협상을 더욱 장기전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지금의 한반도 관계에서 문재인 정부의 역할이 점차 줄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후반기를 맞고 있어 처음과 같은 동력을 갖기 힘들다. 그런데다 우리 정부에 대한 북한의 불신은 상당하다. 2월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이러한 인식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정재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식 해법인 쌍잠정(북한의 핵미사일 발사와 한·미의 연합군사훈련 동시 중단)과 쌍궤병행(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함께 조속한 시일 내 4자 혹은 6자회담을 재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속이 타들어가는 북한과 미국을 달랠 카드가 문재인 정부엔 많지 않다. 12월3일 리태성 북한 외무성 미국 담당 부상의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은 것은 미국의 선택이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엇으로 선정하는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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