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새로운 길’] 아직도 기회 남아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yhkoh@dongguk.edu)
  • 승인 2019.12.16 10:00
  • 호수 157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쿄올림픽까지 한.미 연합군사연습 잠정 중단 등 주도적 정세 관리 나서야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한반도 정세는 최악이었다. 북한이 연이어 핵·미사일 고도화를 위해 실험을 지속했다. 이에 맞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를 공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리틀 로켓맨’이라고 비하했고,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을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맞받았다. 이른바 ‘미치광이 협상 전술’을 구사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치 못한 임의의 시각에 군사력을 사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한·중 관계는 사드 배치 문제로 불편했고,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소원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 등을 통해 전쟁 반대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오직 평화’란 기치 아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구체화하고 실천해 나갔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6·12 북·미 공동성명 채택으로 급진전할 것 같았던 ‘안보(평화체제)-안보(비핵화) 교환’의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가 올해 2월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 도출에 실패하면서 교착국면에 빠졌다.

하노이 ‘노딜’ 이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남측 당국에 대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하지 말고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될 것을 요구했다. ‘하노이 노딜’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에 화풀이를 하고, 미국이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내놓지 못할 경우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19일 밤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에 입장한 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19일 밤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에 입장한 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北 “오지랖 넓은 중재자·촉진자 행세 말라”

북·미와 남북이 상호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가운데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연결해 단계별 동시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변 정세마저 복잡해져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는 기로에 섰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문 대통령의 평화 우선의 한반도 정책,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의 압박과 관여 정책, 김정은 위원장의 경제·핵 병진노선 결속과 경제발전 우선 노선 사이에서 이익의 조화점을 찾아 톱다운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할 때는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가 급진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각국의 국내정치 변수와 국제정세 변화가 개입하면서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는 교착 국면에 봉착했다.

북한이 하노이 노딜 이후 남한의 ‘중재자’ ‘촉진자’ 역할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F-35A 스텔스기 등 첨단무기 도입을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 및 9·19 남북 군사합의서 위반이라며 강하게 반발하면서 올해 남북관계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북한이 남측의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쌀 5만 톤 지원을 거부하고, 금강산국제관광지구 독자개발을 위한 남측 시설물 철거를 요구하는 등 남북관계는 꽉 막혔다.

김정은 위원장이 ‘오지랖’이란 말까지 써가면서 남측의 역할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것은 비핵평화협상에서 남측이 미국과 한편이 돼 북측의 의도를 잘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과 남북 합의 이행에 남측이 소극적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남측이 남북관계를 비핵평화협상에 종속시켜 ‘남북관계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남과 북은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여건이 조성되는 데 따라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을 재개하기로 했지만,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두 사업에 대한 조건 없는 재개를 표명했음에도 우리 정부는 대북제재 공조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가 본격화해 제재가 완화되면 남북경협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북·미 비핵평화협상이 지체되면서 남북관계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완전히 단절됐다.

과거 북한과 만든 모든 남북 합의와 비핵화 합의가 합의 직후부터 합의문 해석과 이행을 둘러싼 갈등으로 곧바로 사문화된 전례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선언 당시 모두발언에서 “이미 채택된 북남 선언, 모든 합의를 이행해 나가는 것으로 관계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남북 합의 이행을 본격화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 합의가 비핵평화협상에 발목 잡혀 있기 때문이다. 비핵평화협상의 장기적 성격을 고려할 때 남북관계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찾아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에 저촉되지 않는 남북 합의 이행을 위해 적극 노력했어야 했다. 어쩌면 우리가 북측의 의도를 무시하고, 미국의 선의를 너무 믿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정세가 좋을 때 우리 정부가 촉진자 역할을 충실히 해 북·미 협상을 가속화하고, 당사자로서 남북 합의 이행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지난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많은 남북 합의를 도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지만, 남북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하면서 선미후남(先美後南) 자세를 보여 우리 정부의 역할 공간은 상당히 축소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월5일 청와대를 예방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2월5일 청와대를 예방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南 미온적 태도에 北 불신 갈수록 커져

남·북·미 정상들이 톱다운 방식으로 비핵평화협상을 시작할 당시에는 각국의 정보기관이 동원됐다. 외교협상의 경험이 거의 없는 북측 통일전선부는 남측 정보당국의 대미 정보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노이 노딜을 계기로 북측은 협상에 나섰던 통일전선부 라인을 외교부 라인으로 교체하고 남측을 통하지 않고 대미 직접협상을 시도했다. 북한은 남측이 남북 합의 이행에 소극적이며 대미 추종의 외세의존 정책을 지속한다며 비판하고 있다.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한 것을 두고 “소뿔 위에 닭알 쌓을 궁리를 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남측 당국이 지난해 말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가능성을 시사하고, 수령 체제의 속성을 고려하지 않고 다자 정상회의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한 데 대해 ‘때와 장소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비난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비핵평화 프로세스는 이제 한계에 봉착한 것일까. 북한과 국내외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강 대 강’으로 치닫고 있는 북·미 대치 국면에서 극적인 돌파구를 열고 비핵평화협상의 진전을 이룬다면 남북 합의 이행 등 남북관계 진전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남은 연말까지 집중력을 발휘해 북한이 내년도 김정은 신년사에서 북·미 협상 결렬과 같은 파국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이다.

탄핵 국면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이 양보로 비칠 수 있는 새로운 셈법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이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모멘텀을 유지하는 노력을 적극 해야 한다. 예정된 한·미 공중군사연습 유예 정도로 궤도 이탈을 막을 순 없다. 우리 정부가 다시 촉진자 역할을 해 북·미 협상을 견인해야 한다. 그리고 당사자로서 도쿄올림픽까지 한·미 연합군사연습 잠정 중단,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유엔군사령부 역할 조정, 남북 합의 이행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세 관리 노력은 자율성과 독자성을 확보해 적극 추진해야 한다.

☞ ‘北, 새로운 길’ 특집 연관기사

[北 ‘새로운 길’] “김정은, 당장 파국 몰고 갈 가능성 낮다”

[北 ‘새로운 길’] 북·미 외교협상단도 팽팽한 기싸움

[北 ‘새로운 길’] ‘北과 의회 사이’ 한계 봉착한 트럼프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