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나 본 ‘풍운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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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영결식 엄수
“그래도 도전해 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여전히 많거든…조국에 진 빚 갚겠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2017년 3월 서울 퇴계로 대우재단빌딩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시사저널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7년 3월 서울 퇴계로 대우재단빌딩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이봐. 송 기자. 자네가 인쇄소 가서 파지 처리된 종이를 모아서 (그 내용으로) 기사를 썼다며?”(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아닙니다. 다른 기자가 한 걸 착각하신 거 같은데요.”(기자)

“그래? 어찌 됐건 간에 그게 기자 정신이야. 아~ 대단해. 그런 도전정신이 필요해.”(김 전 회장)

기자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다. 하노이 외곽 모처에서 만난 그는 만나자마자 기자에게 대뜸 자신의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야기를 꺼냈다. 2014년 8월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 나눈 대담 형식을 빌린 이 책은 국내에서 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책에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부터 2002년 대우그룹 해체 때까지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가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당시 경제부 기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던 터라 구체적인 출간일이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리고 모 언론사가 인쇄소에서 파지 처리된 원고 일부를 입수해 보도하면서 책은 출간 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날 김 전 회장은 기사를 쓴 장본인이 기자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김 회장은 “그게 도전정신이야”라며 누군지도 모르는 기자의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2014년 8월 출간 기념으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신장섭 교수는 기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사자후를 토해 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 이야기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김우중 회장이 스티브 잡스보다 훨씬 훌륭한 경영자라고 생각합니다. 잡스는 일생을 개인과 회사의 이익만 추구했지만, 김 회장은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김우중 회장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장내 분위기는 순간 술렁였다.

 

해외출장 때 양말 든 검은 비닐봉지 직접 들고 다녀

재계에서 김우중 전 회장만한 풍운아가 있을까. 그를 단순히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해 한때 재계 2위의 그룹 총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만 설명하는 건 이제 식상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김 전 회장은 우리나라 기업인 중 해방 후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회사를 설립해 국내 최대 기업으로 키운 사실상의 첫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이병철, 정주영 창업주와는 결이 다르다. 김 전 회장은 경기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던 중 트리코트 원단 생산업체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세웠다. 대우(大宇)라는 기업명은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

개인회사가 아닌 주식회사로 출발한 점도 다른 대기업과 차이가 난다. 시작부터가 현대적인 방식이었다는 뜻이다. 다른 대기업들이 내수시장을 공략하면서 사세를 키웠다면 대우는 처음부터 해외수출을 주력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해방 후 한국 기업 경영의 성공적인 성장모델을 대우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경제사가들도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2월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진은 출장을 위해 찾은 공항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 김 전 회장의 모습. ⓒ연합포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2월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진은 출장을 위해 찾은 공항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 김 전 회장의 모습 ⓒ연합뉴스

그는 현역 시절 자신을 ‘지독한 일벌레’로 묘사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식사는 차에서, 잠은 비행기에서 자는 게 일상이 될 정도로 그는 평생을 일에 빠져 살았다. 지근거리에서 함께한 동료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유춘식 전 대우폴란드자동차 사장의 말이다. “하루는 회장님이 폴란드에 오시더니 대뜸 ‘여기까지 왔는데 자네 집에 안 갈 수가 없겠다. 같이 집으로 가자’는 거 아니겠어요. 정말 편하게 몇 시간 있다가 가시더라고. 그런데 집에 올 때부터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으시길래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양말이라는 거예요. 하도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니셔서 양말 갈아 신을 시간조차 없으셨나봐. 비서한테 시키면 되지, 그걸 본인이 손수 세탁하는 건 또 뭐야.” 30여 년간 해외출장 거리는 지구를 240바퀴 돈 정도인 954만km다.

대우는 삼성, 현대처럼 기업을 직접 세워 키우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980년 신군부로부터 기업 통폐합을 종용받을 때 동석해 있던 김 전 회장을 향해 “난 당신처럼 사업하지 않았어”라며 날을 세운 것에는 이러한 생각 차가 깔려 있다. 대우가 선택한 것은 부실기업을 인수해 새롭게 변신시키는 방식이다. 오늘날 현대 기업 세계에선 흔히 있는 방식이지만 당시 재계에서 그는 이단아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 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건설사와 종합상사의 결합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모델이다. 오늘날 주요 사회간접자본에서 일본계 종합상사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걸 김 전 회장은 일본 기업보다 먼저 생각해 냈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키웠다.

특유의 수완으로 손대는 사업마다 황금알을 낳는 효자산업으로 탈바꿈시킨 덕에 대우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계열사 41곳, 해외법인 396곳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의 기업에 이름을 올린다.

 

“DJ 정부 구조조정, 대한민국 경제 활력 떨어트려” 비판

부실기업에 활력을 집어넣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게 만드는 ‘김우중 매직’은 해외에서도 통했다. 동남아·동유럽·중남미·중동·아프리카 등 당시 김 전 회장과 대우의 발자취는 대한민국 해외 진출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들 나라에서는 ‘대한민국’(Korea)보다 ‘대우’(Daewoo)를 더 먼저 알 정도로 대우의 해외 진출은 적극적이었다.

대우그룹 최연소 임원으로 ‘김우중의 입’으로 통했던 백기승 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은 “13일 동안 회장님을 모시고 리비아·불가리아·폴란드·프랑스·독일 등 9개국을 돌아본 뒤 우리 대우와 한국 기업의 살길을 △해외집중 △세대교체 △경영혁신 등 3가지로 압축 요약했다. 그걸 하나의 단어로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게 ‘세계경영’이라는 말이었다. 그 단어를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아쉬워했다.

거침없이 몸집을 키우던 대우에 IMF 외환위기는 몰락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샐러리맨의 우상에서 국가경제를 망친 주범으로 추락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4년 내놓은 회고록에서 김 전 회장은 “당시 DJ 정부의 구조조정은 대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트린 부적절한 해법”이라고 비판했다.

기자가 김 전 회장을 공식 인터뷰한 것은 2015년 베트남 하노이와 2017년 서울에서 두 차례였다. 80세가 넘은 고령이었지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그런지 김 전 회장은 숫자 하나까지 세세하게 기억했다. 주변인들이 전하는 그는 화려한 영광을 아쉬워하기보다 미래를 더 기대하고 준비하는 사람이다. 2017년 3월 김 전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의 일화다.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는데 감회가 어떠세요.”(기자)

“감회라고 할 게 뭐 있나. (중략) 내가 지금 우리 사회에 강조하고 싶은 건 기업가 정신이야.”(김 전 회장)

“IMF 체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세요.”(기자)

“IMF 시스템은 문제가 많지. 지금 봐. 저성장과 청년실업, 사회 양극화 등은 모두 IMF의 결과물이야. 부실기업을 정리한다고 하면서 제조기업들을 문 닫게 하고. 난 그때도 말했어요. IMF는 시스템의 위기가 아니라 금융조달의 일시적인 문제일 뿐이라고.”(김 전 회장)

“그런 면에서 정부가 많이 아쉽지요. 회장님?”(기자)

“….”(김 전 회장)

1999년 10월 중국으로 출국한 김 전 회장은 5년8개월 동안 해외에서 지냈다. 당시 국내에선 체포조까지 구성돼 그의 행적을 찾았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얼마 안 가 베트남에서 지낸다는 소식이 모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베트남 정부에 김 전 회장은 은인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과 국교가 수교되기 전에 가장 먼저 자국을 찾아온 해외 기업인이 바로 ‘체어맨 킴’(김우중 전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그는 오랜 해외생활을 끝마치고 귀국길에 오른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조용히 마무리 지을 테니 들어오시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막상 입국장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뀌었다. 입국 직후 구속된 김 전 회장은 2006년 11월 항소심에서 징역 8년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는다. 이듬해 대통령 특사로 사면됐지만, 17조원의 추징금은 여전히 그와 그를 보필하던 참모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5년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환하게 웃으며 기자와 사진포즈를 취했다. ⓒ송창섭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5년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환하게 웃으며 기자와 사진포즈를 취했다. ⓒ시사저널 송창섭

살아생전 김 전 회장은 가족들에게 “절대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1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해 말년에는 허리디스크에 시달렸으며 지난해 말부터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도 보였다. 대우재단 관계자는 “2018년부터 외부 행사에는 일절 나오지 않으셨으며 주로 병원과 자택을 오가며 지내셨다”고 설명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조국에 진 빚은 후학 길러내 갚겠다, 그게 사죄의 길”

대우그룹의 사훈은 ‘창조·도전·희생’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기업 중에서 ‘희생’을 강조한 회사는 대우밖에 없었다. 대우가족을 강조한 것도 특이점이다. 2015년 3월 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은 “대우중공업 문제 때문에 1년가량 거제에서 숙식하며 보낸 적이 있다. 노조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더라”고 털어놓았다.

청년사업가 양성은 그가 말년에 전력을 쏟아부은 일이다. 주변 지인들은 “회장께서 당시로선 분식회계가 관행이었지만 우리 잘못으로 국가경제에 폐를 끼친 것을 되게 미안해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인재를 길러내 한국 경제 부흥을 이끌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손수 쓴 스테디셀러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정신을 몸소 젊은이들에게 실천했다. 최측근인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별도의 유언은 없었고, 숙원 사업인 해외 청년사업가 양성(GYBM) 사업을 잘 유지‧발전시켜 달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밝혔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진행하는 GYBM 사업은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 4개국에서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현지 기업에 취업시키는 프로그램이다. 2011년부터 시작한 프로그램은 매년 100여 명의 청년들을 선발해 전액 무료로 교육시켜 현지에선 ‘김우중 사관학교’라고 불린다.

2015년 1월 인터뷰 이후 국내에서 김 전 회장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회장님, 청년들이 도전하는 모습이 보기 좋던데요.”(기자)

“송 기자도 한번 도전해 보겠어? 근데 이거 만만치 않을 거야.”(김 전 회장)

“네 좋지요.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 중 어디를 추천하시겠습니까.”(기자)

“세 나라 모두 괜찮지만, 내가 송 기자라면 인도네시아를 가겠어. 우선 인구가 많고, 문민정부가 막 들어섰거든(최초의 민선인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014년에 취임).”(김 전 회장)

그 인연으로 기자는 2015년 10월부터 10개월간 반둥공과대학(ITB)에서 GYBM 교육생과 함께 수학했다. 특이한 것은 프로그램 중 상당 부분이 기업가 정신 등 경영 및 철학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기상체조와 구보를 하며, 저녁 9시30분에는 군대식으로 점호를 한다. 주중 음주는 일절 금지며 정해진 규칙을 어길 경우 한국으로 귀가 조치된다. 매일, 매주 시험을 치러 성적을 일일이 공개하는 것도 예전 방식 그대로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대학 기숙사에서 현지식으로 식사하며 공부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12월10일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12월10일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측근들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12월9일 밤 11시50분 고단했던 삶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그 주 주말인 13일부터 2박3일간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제1회 GYBM 총동문회 행사가 열린다. 3일장으로 치르기에 12일 발인을 끝마치고 나면 행사 관계자들이 현지로 떠날 수 있다. 9일 빈소인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는 “마지막까지 우리 GYBM을 정말 사랑하셨나보다. 10분만 늦게 돌아가셨어도 행사를 열어야 할지 고민해야 했을 텐데….”

김 전 회장은 기자와 만날 때마다 “왜 우리는 화상(華商) 같은 것을 못 만드냐. 내가 못 이룬 세계경영은 우리 GYBM 연수생들이 이어줘야 한다. 그게 내가 조국 대한민국에 진 빚을 갚는 길이다. 여기서 ‘제2의 김우중’이 왜 안 나오겠느냐”라고 말했다. 빈소에서 안 사실이지만 천주교 신자였던 김 전 회장의 세례명은 ‘바오로’다. 사도 바오로의 선교여행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유럽으로 전파된 것을 보고 이 땅에서 자신의 숙명도 그래야 한다고 본 걸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2015년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이 인터뷰 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송창섭
2015년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이 인터뷰 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시사저널 송창섭

아방궁에서 호화생활은 ‘낭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베트남에 장기 체류하고 있을 때 한국에는 이상한 소문이 전해졌다. “대우 직원들은 거리로 내몰고 본인은 정작 골프장에서 떵떵거리며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다.”

기자는 2015년 사실 확인차 베트남 하노이에 직접 가봤다. 하노이 북부에 위치한 반찌(Van Tri) 골프클럽은 일반 회원제 골프장 수준이었다. 경비초소가 있는 입구를 지나 클럽하우스까지 가는 도로 양쪽에는 모내기를 하는 베트남 농민들의 일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역 시절 김 전 회장은 골프를 일절 치지 않았다. “현장 돌아다니기도 바쁜데 한가로이 무슨 골프냐”며.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던 해외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도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산책을 겸한 운동에 불과했다. “회장님은 1번 드라이브만 갖고 라운딩을 합니다. 그냥 볼을 치면서 걷는 거라고 봐야죠. 하도 갑갑해하시니….”

이 골프장은 셋째 아들 선용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벤티지홀딩스가 소유하고 있다. 반찌 골프클럽 관계자는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인 2000년대 초반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증여한 돈으로 산 것으로, 일부에서 말하는 비자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여서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 가치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말했다. 기자는 당시 클럽하우스 2층에 위치한 김 전 회장 주거공간을 살짝 엿본 적이 있다. 66㎡(20평) 내외로 구성된 내실에는 거실과 침실이 각각 1개씩 자리 잡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쓰는 침실 크기도 육안으로 보기에 33㎡(10평)가 채 넘지 않아 보였다.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대기업 총수의 침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소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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