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들이 안심하는 사회는 언제쯤 올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4 17:00
  • 호수 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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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아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유치원 3법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이 글이 지면에 나갈 때쯤에는 무사히 통과되었기를 빈다.

유치원 문제가 불거지는 동안 이 나라에서 아이를 기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떠올렸다. 나 또한 30년 전엔 ‘워킹맘’으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멀리 방화동에서 혜화동까지 버스를 세 번씩 갈아타며 아이를 데리고 출퇴근을 한 일도 있을 만큼 극한 고생을 했다. 유치원 마치고 내가 퇴근하기까지의 빈 시간에 회사 앞 골목에서 놀던 아이가 잠깐 실종되는 끔찍한 경험도 했다. 직장을 가진 소위 ‘워킹맘’으로서 따로 아이를 돌보아줄 사람 없이 취학 전 아동을 보살피는 일은 정말 어렵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낼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고 그걸로 충분하면 참 좋으련만. 이미 들어간 유치원에서도 갖은 사건이 일어나고, 이 때문에 엄마들은 전전긍긍한다. 아빠들도 물론 그러겠지? 이 점은 일단 논외로 하자.

정태춘이 《우리들의 죽음》을 쓰게 한 사건은 1990년 일어났다. 망원동 반지하방에 살던 노동자 가족은, 엄마는 파출부로 아버지는 경비원으로 일하러 가야 했기에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양한 아동범죄와 사고가 두려웠던 부모가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촛불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초가 넘어져서 발생한 화재로 결국 질식해 죽었다. 1980년대에 공부방 운동을 하던 청년들은 이런 사건이 매우 흔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더는 벌어지지 않도록 국가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나는 가끔 몹시 궁금하다.

12월10일 스쿨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숨진 고(故) 김민식군 어머니 박초희씨와 아버지 김태양씨가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을 나와 취재진에게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12월10일 스쿨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숨진 고(故) 김민식군 어머니 박초희씨와 아버지 김태양씨가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을 나와 취재진에게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아이들 죽음은 근대문명 부산물이란 점에서 가혹

게다가 모든 것이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계량화되고 사업화되어 가는 와중에, 아이들을 위한 정책의 목적이 이들을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보육과 교육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한 일부 시민들을 법으로 규제하면 건전한 보육이 돌아오기는 할까. 믿어야겠다.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다. 어린이집에서 학대받다 죽고, 한여름 자동차 안에서 죽고, 부모 되기를 고통스러워하는 부모에게 죽고, 다양한 이유로 죽는다. 예전에도 아이들은 죽었다. 내 나이쯤 되면 형제자매 중에 일찍 죽은 이가 한둘쯤은 다 있다. 부모 세대로 가면 그 수가 더 늘어난다. 하지만 최근의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한 보고는 옛날 같은 죽음을 벗어나고자 인류가 노력한 결과 도달한, 소위 말하는 발전한 근대문명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가혹하다. 유치원 3법이 근본적 층위에서 이러한 죽음으로 향하는 비탈길에 쐐기 하나라도 박을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렇더라도 모든 부모는 국가의 보조를 받아서 아이를 유치원에 맡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치원을 돈벌이가 잘되는 유치원 ‘사업’으로 접근한 수많은 ‘원장’들이 국가가 충분한 보조와 제대로 된 감독을 해서 건전한 경영을 하게 되고, 충분한 인력과 처우를 해서 유치원 교사들이 아이들을 부모처럼 돌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또 몹시 궁금하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혜택 밖에 존재하는 어린이들은 또 얼마나 될까. 복지의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다양한 위험 앞에 어떤 보호를 받고 있을까.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급식카드’를 쥐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 영양을 공급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 아이뿐 아니라 남의 아이에게도 같은 보살핌의 손길을 나눌 방법은 없을까. 슬프기 그지없다. 그렇더라도 유치원 3법은 꼭 통과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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