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파리엔 캐럴 대신 자동차 경적만 울려 퍼져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5 11:00
  • 호수 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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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과소평가한 마크롱, ‘연금 개혁’ 강행…프랑스 역대급 혼란 예고

2018년 말부터 줄곧 ‘노란조끼 시위’로 홍역을 앓아왔던 프랑스 사회가 2020년 새해를 앞두고 다시금 시위와 파업에 직면했다. 이번엔 ‘연금 개혁’을 둘러싼 철도 및 운송 노동조합의 총파업이다. “짜증 난 프랑스 국민, 그러나 여전히 파업을 이해한다.” 연금 개혁안에 반발한 총파업이 2주를 넘긴 지난 12월17일, 프랑스 라디오 RTL이 내린 중간평가다. RTL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해리스 인터랙티브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2%가 파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업 초 하락세를 보였던 지지 여론이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의 ‘개혁 입장 고수’ 강경 발언 이후 반등세로 돌아선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파업을 지지하는 여론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12월5일 시작된 이번 파업으로 직격탄을 맞은 곳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일 드 프랑스’ 지역이다. 파리와 외곽을 잇는 교외선 철도가 대부분 파업에 동참했고, 파리 시내 14개 노선의 지하철 역시 자동화된 두 개의 노선만이 정상 운행 중이다. 나머지 12개 노선 중 절반인 6개는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으며, 그나마 운행되는 노선마저도 아침과 저녁 출퇴근 시간만 운행하거나 배차시간을 대폭 축소해 운행 중이다. 지방 국철의 경우 5% 미만, 국제선인 테제베(TGV)의 경우 평균 4대 중 1대꼴로만 운행하고 있다.

연금 개편에 항의하는 프랑스 공공 부문 총파업으로 12월6일(현지시간) 파리의 리옹 철도역에 인적이 끊겼다. ⓒ AP 연합
연금 개편에 항의하는 프랑스 공공 부문 총파업으로 12월6일(현지시간) 파리의 리옹 철도역에 인적이 끊겼다. ⓒ AP 연합

‘출퇴근 지옥’ 겪는 시민 “그래도 파업 지지”

대중교통의 파업으로 아침 출근길과 저녁 퇴근길, 파리로 진입하는 모든 주요 도로와 파리 외곽 순환도로의 정체는 일상이 되었다. 평소 200km에서 350km를 보이던 정체 구간은 매일 두 배를 넘기고 있다. 12월16일 월요일 아침의 경우, 파리 근교 출근길 정체 구간은 628km로 역대 신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부산에서 평양까지 가는 거리인 520km를 훌쩍 넘는 길이의 도로가 차량들로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12월13일 금요일 저녁 퇴근길은 비까지 내려 혼잡이 극에 달했다. 파리 남쪽 관문인 ‘포르트 도를레앙’ 주변은 2시간 넘도록 극심한 정체를 겪으며,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했다. 운전자들은 운행을 포기한 채 내려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며, 우버나 택시 승객들은 차에서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짐가방을 끌고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성탄절을 2주 앞둔 파리의 거리는 캐럴이 아닌 자동차 경적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극심한 정체로 운전자들의 논쟁은 다반사가 되었다. 급기야 15일에는 샹젤리제 인근 도로에서 운전자가 보행자와의 말다툼 끝에 흉기를 휘두르는 위험한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파업의 도화선은 마크롱 정부가 2년 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연금 개혁이다. 42종에 이르는 복잡한 연금체계를 하나로 단일화하고, 현재 62세로 되어 있는 연금 기준연령을 64세로 늦춘다는 것이 골자다. 12월1일 파업을 목전에 두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인 레제코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5%의 응답자가 개혁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마크롱 정부 입장에선 ‘개혁 청신호’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수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동 연령이 늘어난 것에서도 응답자의 57%가 ‘수긍’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67%가 개혁의 주요 골자인 ‘연금체계 단일화’에도 찬성을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마크롱 정부는 강한 반발에 직면해 있다. 왜일까?

“CFDT(민주노동동맹)를 잃은 것이 가장 큰 패착(敗着)이다.” 이번 파업이 폭발한 원인에 대한 프랑스 정치 평론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부의 개혁노선에 협조적이었던 노조인 CFDT가 반대로 돌아서며 파업의 파급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프랑스 노조는 정치 성향에 따라 강성 좌파 계열의 CGT(노동총동맹)와 FO(노동자의 힘) 그리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CFDT 계열로 나뉜다. CFDT는 정부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협상을 이어가며 연금 개혁에 대해 원칙적인 동의를 보여왔다.

그렇다고 모두 양보한 것은 아니었다. CFDT가 마지노선으로 줄기차게 제시한 대목은 연금 기준연령인 62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지난 7월부터 개혁법안의 발표를 앞두고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보내며 정부와 ‘교감’이 있다고 믿었던 CFDT는 막상 정부가 64세로 2년을 연장하는 법안을 들고나오자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CFDT가 개혁 찬성 대열에서 벗어나 반대로 돌아서자 도미노처럼 그동안 유연했던 노조들이 모두 개혁 반대로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10여 년 만에 프랑스 모든 노조가 단일 대오를 형성하는 장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2월10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제2의 노동단체 노동총동맹(CGT) 소속 노조원들이 연금 개편 반대 파업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 AP 연합
12월10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제2의 노동단체 노동총동맹(CGT) 소속 노조원들이 연금 개편 반대 파업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 AP 연합

마크롱, “파업에 밀리면 레임덕” 우려

프랑스 정치학자인 로랑 카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노조와 정부 간의 치킨게임 양상을 두고 “마크롱 대통령의 과도한 자신감이 우려스럽다”고 지적한다. 12월초 여론조사에서 50%로 나타났던 ‘연금 개혁 지지층’만 바라보고 자기 확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49%에 이르렀던 연금 개혁 반대 목소리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마크롱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는 과연 연금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까. 아니면 파업에 못 이겨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을까. 만일 후퇴할 경우 곧바로 이어지는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대선까지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지난 1995년 시라크 정부 때도 연금 개혁을 추진하다 3주간의 파업 역풍으로 개혁을 접어야 했고, 곧장 레임덕으로 직행한 바 있다. 그렇다고 개혁을 밀어붙일 경우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로랑 카롤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프랑스 사회에서 연금 문제는 가장 예민한 사안”이라고 전제하며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않으면 모두 패자가 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직까진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 강행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내 파업의 강도는 날로 거세지는 모양새다. 프랑스 노조들의 파업은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지난 12월17일 열린 3차 결의대회에선 전국에서 20만 명가량이 모인 것으로 집계됐다.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맞물려 대규모 파업에 따른 교통·물류난은 프랑스 전역에 ‘역대급’ 혼란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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