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빌미로 ‘문화 만리장성’ 단단히 쌓아 올린 대륙의 옹졸함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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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4화 - 포화 속에 꽃핀 예술혼

얼마 전 미국의 한 대학 관현악단의 중국 공연이 예기치 못하게 취소된 적이 있다. 한국인 단원들에 대한 중국 입국을 중국 정부가 거부 조치한 것이다. 미사일 방어망인 사드가 한국에 배치된 일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사드 보복이 바다 건너 미국 내 한인들에까지 확대된 셈이다. 이 대학 학장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는 필하모니가 하나로 공연할 수 있는 것”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중간의 군비 경쟁을 빌미로 학생들의 순수한 예술 활동을 막아 버린 일은 중국 당국의 ‘문화적 폭력 행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럴 만도 한 게 인류 역사는 때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기적 같은 예술혼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쟁 참화 속에서 예술혼 꽃피운 인류의 평화 의지

20세기 들어 세계대전의 와중에도 예술적 감동으로 ‘깜짝 평화’를 이룬 적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영국군과 독일군은 벨기에 전선의 참호 속에서 성탄 전야를 맞게 되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영국군이 전장의 긴장감을 늦추기 위해 백파이프 연주를 시작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로 코앞에 있는 독일군 참호에서 캐롤송이 흘러 나왔고 이어 양측 병사들이 합창으로 호응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서로에게 겨누던 총을 거두고 악수를 나누며 이날 하루 정전하기로 했다. 이 기묘한 풍경은 참전국 전사에 기록된 실화이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국내에 상영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군에 포위당해 900일 간 약 100만 명이 희생된 구(舊)소련 레닌그라드에서도 인류의 예술혼은 멈추지 않았다. 1942년 8월9일 저녁, 이곳 음악회장에 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국민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만든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의 첫 연주회가 열린 것이다. 1년째 봉쇄를 당해 저마다 굶주리고 지친 표정이었지만 연주회장엔 뜨거운 열기가 넘쳤다. 연주는 확성기를 통해 강 너머 독일군 진지까지 울려 퍼졌고, 이날 하루 포성이 멎었다고 한다. 언론은 “오늘 적과 아군은 음악으로 하나가 되었다”며 감동을 전했다. 두 사건은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위안을 건네는 예술의 위대함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벨기에 이프르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정전’ 기념비. 오른쪽 위는 독일군 봉쇄로 텅 빈 레닌그라드 시가지. 아래는 당시 연주회 모습과 쇼스타코비치
벨기에 이프르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정전’ 기념비. 오른쪽 위는 독일군 봉쇄로 텅 빈 레닌그라드 시가지. 아래는 당시 연주회 모습과 쇼스타코비치

그 무렵 일제 침략으로 총소리가 그치지 않은 대륙의 전쟁터에서는 오페라 공연도 열렸다. 1940년 중국 시안에서 한인과 중국인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가극 《아리랑》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두 나라 군인들을 위로하고 지역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심어 주려는 취지였다. 흥미롭게도 이 가극을 작곡하고 주연을 맡은 이는 한형석(1910~96)이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군인이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면서도 그는 종전까지 20여 차례나 ‘전시(戰時) 공연’을 이뤄내 광복군과 중국군의 연합 전선 강화에 힘을 보탰다. 중국 ‘시안일보’는 이 가극을 “음악계에 전례 없는 200명대연합의 악단과 합창단이 동원된 놀랄 만한 파격”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한인 목동의 처절한 항일 정신을 그린 《아리랑》은 우리 음악사상 최초의 가극으로 기록된다. 이를 작곡한 한형석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서부 전선을 누비며 수많은 독립군가와 가극을 만들었다. 광복군 선전부장 시절에는 ‘우리는 포화 속에서 유랑한다’는 내용의 아동 가극 《낙원 행진곡》을 짓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고향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1953년 사재를 털어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전용극장을 세웠다. 그곳에서 2년 동안 500여 차례나 아동극을 무대에 올려 한국전쟁으로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용기와 꿈을 건넸던 것이다.

1944년 중국 시안에서 열린 《아리랑》 공연과 한형석. ‘3·1혁명’ 문구가 눈에 띈다. 오른쪽은 말년의 그와 부산 서구에 있는 ‘먼구름 한형석의 길’
1944년 중국 시안에서 열린 《아리랑》 공연과 한형석. ‘3·1혁명’ 문구가 눈에 띈다. 오른쪽은 말년의 그와 부산 서구에 있는 ‘먼구름 한형석의 길’

한형석의 궤적을 살피다 보면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만큼 삶과 예술의 구분이 없는 올곧은 저항 정신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보 대신 붓과 총을 들고 예술혼을 불사른 또 다른 한인도 있었다. 중국 룽징(龍井)의 ‘미술 신동’ 한낙연(1898~1947)은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간도 조선인 3만 명이 참여한 ‘3·13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 후 프랑스에서 식당 잡부, 거리 화가로 일하며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유럽 각국을 돌며 10여 차례나 개인전을 열 만큼 화가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하지만 파리 생활 8년째 되던 해 중일전쟁이 터지자 “나처럼 붓을 든 사람도 총을 들어야 할 때”라며 귀국 결정을 내렸다. 예술의 본고장에서 안락한 삶을 버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뛰어들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터다. 귀국한 뒤 주은래가 이끄는 홍군 부대에서 정보 장교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적잖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1940년 국민당 정보국에 간첩 혐의로 붙잡혀 3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주목되는 건 그와 김구의 인연이다. 2013년 9월 중국 ‘연변일보’는 “1939년 충칭에서 열린 한낙연의 결혼식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하객으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같은 민족으로서 단순한 친분 관계인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연결된 것인지 알려지진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누구보다 철저한 반일 혁명가란 점에서 그 관계를 짐작해 볼 따름이다.

키질 석굴에 있는 한낙연 자화상과 그가 모사한 벽화. 오른쪽은 그가 파리 거리에서 작업하는 모습
키질 석굴에 있는 한낙연 자화상과 그가 모사한 벽화. 오른쪽은 그가 파리 거리에서 작업하는 모습

한낙연의 저항 정신은 예술적 가치로 승화되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가벼운 붓놀림만으로 생동감을 불어 넣은 그의 화법은 당시 정적인 화풍에 머물던 중국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 성성은 “그는 가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릴 만하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중앙아시아 키질 석굴의 벽화를 발굴, 보존하는 업적도 남겼다. 국공 내전의 포화 속에서도 벽화 형체를 그대로 옮기는 모사(模寫)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7년 이곳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한낙연과 한형석 두 사람 모두 중국군과 함께 ‘공동의 적’ 일제에 맞서 싸웠다. 이들의 활동 무대가 중일전쟁 때 중서부 전선이었고, 똑같이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화가와 음악가로 최전선을 누비며 예술혼을 떨친 점도 같다. 그렇지만 닮은꼴은 여기까지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적으로 돌아서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거기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치 체제가 다른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이들은 각자 한쪽에서만 기억되는 엇갈린 운명을 맞게 되었다.

 

사드 배치에 ‘문화 만리장성’ 쌓아 한류 봉쇄 나선 대륙의 옹졸함

우리 항일 투사들이 대륙의 전선에서 그들과 함께 싸우고 노래하고 춤추던 일은 빛바랜 지 오래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벌써 3년 넘게 ‘한한령(限韓令)’ 봉쇄를 풀지 않고 있다. 교묘한 한국 관광 규제는 여전하고 드라마와 게임, 영화 등 한류 상품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도 “상업적 목적의 한국인 공연 금지” 탓에 대륙 진출이 막혀 있고, 한인 단원 3명의 비자 거부로 미국 대학생들의 연주회까지 취소되는 실정이다. 사드를 빌미로 ‘문화 만리장성’을 단단히 쌓아 올린 꼴이다.

언뜻 2016년 중국에서 발간된 《한낙연 전기》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의 장례식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고위 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서로 적으로 돌아선 내전 상황에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념과 체제, 민족을 떠나 한 걸출한 예술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대국의 ‘풍모’와 ‘포용’이 와 닿는 대목이다. 미국과 군비 경쟁으로 일어난 일로 엉뚱하게 우리 문화예술에 족쇄를 채운 중국 지도부의 ‘옹졸함’과 대비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구 선생은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높은 문화의 힘”으로 세계 평화의 중심이 되기를 소원했다. 새해에는 두 나라 문화 교류가 활짝 열려 한반도 화해의 물꼬를 터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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