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 6465] 장애인, 脫시설이 곧 ‘자립’은 아니다
  • 전북 장수 / 구민주·김종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12.31 15: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탈시설 권유하는 정부, 체계적 자립 지원 시스템은 ‘부재’
중앙과 지자체 책임 떠넘기기 속 지역 민간이 떠맡는 ‘악순환’

농장 일은 끊이지 않았다. 사과를 따고 가축을 돌보고 밭을 갈다 보면 하루가 금세였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도 예외 없이 농장으로 나가 온종일 일을 했다. 원장의 지시는 거스를 수 없었다. 대걸레를 휘두르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게 하는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고된 노역의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전북 장수군 ‘벧엘의집’에 머물던 15명의 발달·지적 장애인들은 짧게는 2~3년, 길면 십 수 년간 학대와 강제노동이 반복되는 일상을 견뎌야 했다.

이곳 장애인들 대부분은 시설에서의 생활이 일생의 전부였다. 벧엘의집에 오기 전에도 다른 시설들을 전전했다. 갖은 고통 속에서도 이들에게 시설을 벗어난 삶은 그저 꿈에 불과했다. 벧엘의집의 실상은 지난 2월 직원들의 내부고발을 통해 드러났다. 지역 시민단체들은 전면적인 조사와 거주 장애인들의 탈(脫)시설을 요구했다. 6개월여가 지난 8월, 장수군은 마침내 시설 폐쇄를 결정했다. 요양병원 등 다른 거주지를 택한 5명을 제외한 10명의 장애인들은 전주시에서 꿈에만 그리던 생애 첫 자립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지난 8월21일 전라북도청 브리핑룸에서 장수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
지난 8월21일 전라북도청 브리핑룸에서 장수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

인권침해 피해 ‘탈시설’했는데…첫발부터 ‘막막’

홀로서기는 막막함의 연속이었다. 이들에겐 탈시설 장애인들에게 정부가 지원하는 자립정착금 1000만원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집 보조금과 가구 등을 들이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그보다 더 캄캄한 건 도와줄 누구도 곁에 없다는 사실. “시설에 다시 들어가는 건 죽어도 싫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밥을 차려 먹지, 어떻게 빨래를 하지 걱정이 계속 생겨요.” 시사저널은 벧엘의집을 나와 자립 일주일을 맞이한 장애인들을 12월27일 전주에서 만났다.

탈시설 이후 맞닥뜨리는 막막함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가 바로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다. 만 6세 이상에서 만 65세 미만 장애인들에게 안정적인 자립 지원을 위해 일정 시간 활동지원사를 배치해주는 제도다. 벧엘의집 탈시설 장애인들 역시 이미 만 65세가 지난 한아무개씨를 제외하고, 자립에 앞서 활동지원서비스를 신청했다. 그러나 이들이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획득한 활동지원시간은 한 달에 60~90시간뿐이다. 하루에 2~3시간 남짓이다. 활동지원사가 이들의 집에 방문해 한 끼 식사를 챙기기도 빠듯한 시간이다.

강현석 벧엘의집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시설에 나오기 전 국민연금공단 직원으로부터 활동지원 평가를 받았는데, 이들의 사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를 받았다”며 “이들은 혼자 버스를 잘 타지도 못하고 길도 자주 잃어버린다. 의사 표현을 명확히 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옆에서 계속 손길이 필요한 상황인데 지금 주어진 활동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대책위의 호소에 전북도에선 이들에게 각각 50시간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역시 이들의 안정적 자립을 돕기엔 한없이 부족하다.

제도의 빈틈은 민간단체인 전주시 중증장애인지원센터에서 오롯이 메우고 있다. 평일 오전부터 늦은 저녁까지 이들을 센터로 데려와 삼시 세끼를 챙기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한다. 모자란 활동지원시간을 주말 이틀로 몰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주 5일 이들의 케어를 도맡고자 한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이른 오전 센터 차량이 이들이 사는 집을 돌며 한 명 한 명 태워 오면, 센터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친 후 늦은 저녁 다시 집으로 데려다준다. 인력과 시스템이 부족해 교육이나 나들이 같은 활동 프로그램은 엄두도 못 낸다. 그저 TV도 없는 센터 사무실 한 곳에 종일 둘러앉아 있는 게 일상이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에겐 홀로 적막한 집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다.

지금도 턱없이 모자라 온정의 손길에 의존해야 하는 이 활동지원 서비스는 만 65세가 지나면 그나마도 반토막이 난다. 당장 오는 5월 65세 생일을 맞는 지적 장애인 김아무개씨는 자립의 기쁨도 잠시 또다시 걱정이다. 김씨는 현재 활동지원사와 한 달에 60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그는 활동지원사와 함께 간식도 먹고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주말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마저 머잖아 빼앗길까 두렵다. 김씨는 “벧엘의집에서 나올 때 이렇게 지원시간이 짧을 것도, 65세에 지원이 끊길 것도 우린 전혀 알지 못했다”며 “지금 활동지원사랑 계속 함께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는 지난 8월부터 거주 장애인들에 대한 전북 장수군의 강제전원조치를 막기 위해 50일여일 간 천막 농성을 진행했다.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 페이스북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는 지난 8월부터 거주 장애인들에 대한 전북 장수군의 강제전원조치를 막기 위해 50일여일 간 천막 농성을 진행했다. ⓒ벧엘장애인의집 대책위원회 페이스북

인권위 “정부, 체계적인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 수립하라”

탈시설 장애인들과 이들을 돕는 시민단체들은 탈시설은 자립의 출발 일뿐, 결코 자립의 완성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진정한 탈시설은 시설을 나온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와 관계 부처에선 탈시설을 권장하지만, 정작 자립 이후에 대한 고민과 지원대책은 충분히 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권 최초로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국정과제로 삼고 탈시설 지원센터 설치, 자립정책금 지원 등을 약속했다. 탈시설 지원 내용이 두루 정리된 장애인정책종합계획(2018~2020)을 발표해 장애인들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장애인 탈시설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장애인과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탈시설 정책을 ‘속 빈 강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기존의 약속에 대해 중앙 차원의 어떠한 정책 시행도 이뤄지고 있지 않으며, 실질적인 자립 지원은 되레 지자체에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자체로 내려온 지원 책임은 결국 각 지역의 민간 사회복지시설의 부담으로 전가되곤 한다. 지역마다 흔히 볼 수 있는 악순환이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9월 “문재인 정부가 탈시설 정책을 국정과제로 채택했으나 여전히 시설·병원 중심의 서비스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좀 더 체계적인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을 수립하라고 권고했다.

최일선에서 장애인들을 돕는 시민단체와 복지시설 관계자들은 부족한 예산과 현행법의 한계를 근거로 들며 지원에 소극적인 정부와 지자체에 답답함을 토로한다. 현재 벧엘의집 대책위원회에선 벧엘의집 탈시설 장애인들을 당장 전담 케어할 수 있는 인력 지원을 지자체에 요구하고 있다. 10명의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최소 4명의 인력이 필요한데, 이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만 지급할 수 있는 예산을 지원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북도와 전주시, 장수군이 해당 예산 편성을 서로 떠밀고만 있어, 이들의 요구가 반영될지 요원하다. 강현석 벧엘의집 대책위 대표는 “‘탈시설’이라는 세 글자를 완성하기 위해 아직 채워야 할 게 너무나 많다”면서 “지금처럼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이라면, 무조건 탈시설이 답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연관기사

[사선 6465] 생일날, '고려장'을 당했다
[사선 6465] “대통령님 부탁드립니다. 지금처럼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사선 6465] “여보, 나 막막해”…가족도 쓰러뜨리는 ‘고통의 도미노’
[사선 6465] 국회에 지쳐 헌법재판소로 간다
[사선 6465] 장애인활동지원 연령제한은 ‘현대판 고려장’
[사선 6465] “활동지원사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어느 장애인의 하루
[사선 6465] “포기하기엔 아직 일러…곧 가시적 성과 기대”
[사선 6465]“고령 장애인 문제, 정책 아닌 정치가 해결해야”

[사선 6465] 다시 한 번 희망을…‘고령 장애인’ 문제 해결 약속한 국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