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인간만이 노동을 한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04 17:00
  • 호수 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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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노동의 상관관계

페미니스트가 왜 노동문제에 그리 관심이 많으냐고, 그것도 여성 노동자 문제도 아닌데, 라고 하는 핀잔을 들었다. 내가 여성과 노동을 이야기할 때 주로 말하고 생각하는 내용이 여성과 노동, 하면 떠오르는 성별분업화된 이미지들과 동떨어져서다. 나는 여성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의 운명 그 자체에 관심이 많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바로 그 인간의 운명을 고민하는 사람이 요즘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닌가 싶다.

여성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나의 지속적 고민은 이런 것이다. 인간 사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가부장 제도를 근간으로 젠더화되어 있다고. 그래서 여성에게 존엄이 없다고. 서양 말들에는 대부분 언어 자체에 성별이 있을 정도다. 동양에도 음양은 세상의 기본이고. 세상을 남성계열과 여성계열로 나눠 보는 것을 바로 젠더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구분이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면?

산업화 시대에 인간의 노동력은 ‘싼 가격’으로 치부되고 있다. ⓒ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캡처
산업화 시대에 인간의 노동력은 ‘싼 가격’으로 치부되고 있다. ⓒ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캡처

‘변화한 시대’ 읽으라는 요구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일어나

우리가 소위 근대라 부르는 산업사회 역시, 아주 엄격한 성별분업 체계 위에 유지되었다. 산업사회 초기에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혹한 노동에 동원되어 인류의 평균수명이 짧아질 정도로 혹사당하자, 노동하는 인간을 재생산(다른 말로 출산이라 한다)하고 주된 노동자인 남성들이 안정적 노동을 하도록 유지·관리할 필요에서 자본주의적 근대 가부장제가 새로운 질서가 되었다. 이 성별분업이 일시적으로나마 무너진 것은 전쟁 등에 따른 급격한 인구변화 때문이었다. 이렇게 견고하던 성별분업 체계를 실제로 흔든 것은 페미니즘의 약진 때문이기보다는 노동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동이 점점 더 옛 질서와 체계가 통용되지 않게 변화해 버린 것이다. 변화한 시대를 읽으라는 요구가 오히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

문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소위 부불노동(지불을 안 하는, 즉 공짜 노동)이던 여성의 노동이 값을 얻어가며 돌봄노동이란 이름으로 변화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가사노동이 부부가 함께 해야 하는 노동으로 인식된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며, 남성젠더의 분야로 인식되던 각종 전문직과 심지어 중공업 생산직에 여성들이 진출하거나 돌봄노동 등 연성노동 분야에 남성들이 진출하는 변화도 최근 들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노동체계가 성별분업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뿔뿔이 흩어진 파편화된 개인노동으로 변화하는 것을 본다. 각종 프리랜서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들을 젠더로 묶어세우기 어렵다. 아니, 인간이 하기 위험한 일을 값싼 기계가 대신 하던 시대를 지나, 인간의 가격이 싸서 기계 대신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젠더가 아니라 인간이냐 기계냐가 될 판이다.

노동하는 인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1년 발표한 회칙의 이름이다. 이 회칙은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 이후 거듭 발표되는 사회교리 회칙의 내용을 제목에서부터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고, 노동을 통해 신성에 도달하는 존재이며, 교회는 그 노동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120년 전, 80년 전, 40년 전에도 계속 이어졌다. 노동은 언제나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40년 후, 2020년이라는 의미심장한 해를 맞이한다. 한쪽에서는 젠더분업이 와해되고 다른 쪽에서는 AI가 압박하는 이 새로운 시대에 노동하는 존재는 여성인가, 남성인가. 사람인가, 기계인가. 아니다, 기계는 노동하지 않는다. 존엄한 인간만이 노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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