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지 취재] 축구장 300개 넓이, 세계 산업 안전은 우리가 지킨다
  • 공성윤·오종탁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2 10:00
  • 호수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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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英 산업 안전의 산실 보건안전연구소 한국 언론 최초 취재

“이 넓은 벌판이 모두 실험실입니다.”

시사저널은 2019년 12월5일 한국 언론 최초로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보건안전연구소(HSE Laboratory·이하 HSE 랩)를 찾았다. 영국 산업 안전의 산실과도 같은 이곳은 정부 기관인 보건안전청(HSE) 소속이다. 이들 스스로는 영국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산업 안전 본부를 자처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산업 관계자들이 찾아와 안전 노하우를 배워 가기 때문이다. 

2019년 12월5일(현지시간) 방문한 영국 맨체스터 HSE 랩의 야외 실험실
2019년 12월5일(현지시간) 방문한 영국 맨체스터 HSE 랩의 야외 실험실 ⓒ 시사저널 오종탁

취재진은 차를 타고 짙은 안개로 뒤덮인 언덕 구간을 20분 넘게 지나갔다.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마침내 도착한 HSE 랩 건물은 목초 지대 같은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이었다. 니콜라스 릭비 HSE 수석감독관은 취재진을 안내하며 “미국이 세계 최고의 산업 안전 연구소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규모 면에선 우리가 더 크다”고 밝혔다. 건물 내 시설과 야외 실험실(벌판)까지 합친 HSE 랩의 총면적은 약 500에이커다. 축구장 300여 개 넓이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안개로 가려져 있던 곳 대부분이 HSE 랩의 일부란 걸 알게 됐다. HSE 랩에서 일하는 석·박사급 연구원은 200명에 달한다.

사무 공간을 거쳐 실내 실험현장으로 향했다. HSE 랩 건물에는 수많은 실험실이 존재한다. 보안상 직접 공개하지 않았지만, 50개 정도인 것으로 파악된다. 실험실 근무자들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무실 직원들과 대비됐다.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묻자 온화하던 릭비 수석감독관의 표정이 무겁게 바뀌었다. “Nope.”(안 됩니다.) 실험실을 비롯해 HSE 내부의 어느 곳도 촬영해선 안 된다고 릭비 수석감독관은 설명했다. 산업재해 사고의 증거물 등에 대해 보안을 철저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실 문 앞에는 ‘No Photo’(사진 금지), ‘Warning’(주의) 등 문구가 굵직하게 쓰여 있었다.

(왼쪽)HSE 랩의 정문 앞에 선 니콜라스 릭비 수석감독관 (오른쪽)취재진이 영상으로 목격한, HSE 랩의 차량 폭발 실험 장면 ⓒ 시사저널 오종탁·HSE
(왼쪽)HSE 랩의 정문 앞에 선 니콜라스 릭비 수석감독관 (오른쪽)취재진이 영상으로 목격한, HSE 랩의 차량 폭발 실험 장면 ⓒ 시사저널 오종탁·HSE

드디어 첫 번째 실험실 문이 열렸다. 쿰쿰한 냄새가 났다. 거중기, 건물 골조, 풍력발전소 터빈 등 산재 사고 증거물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모두 HSE 감독관들이 실제 사고현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뒤이어 찾은 실험실엔 침상과 휠체어, 환자를 실어나르는 기구가 두 개씩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릭비 감독관은 “이곳은 환자를 이송할 때 발생하는 부상이 간호사의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기구의 잘못된 설계 때문인지를 밝혀내기 위한 실험실”이라고 말했다. 

다시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일명 ‘자바라연통’이라 불리는 주름진 금속관이 얼기설기 설치된 실험실로 들어섰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연통의 휘어진 정도와 너비 등을 측정해 유해가스의 안전한 유출 경로를 찾는다”고 했다.

보안상 출입조차 불가능한 실험실도 있었다. 창문 너머로 서로 다른 재질과 색깔의 연구복 4~5벌이 보였다. 온도, 압력, 신체의 움직임 등 각종 환경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장비를 개발하는 곳이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영국에서 발생하는 웬만한 산재 관련 연구는 모두 HSE 랩에서 커버한다고 보면 된다”며 “연구할 때는 단순히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밝혔다.

사정상 둘러볼 수 없었던 야외 실험실은 자료 영상을 통해 대신 접했다. 화면 속의 야외 실험실에선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규모 폭발, 화학, 충격 실험 등이 이어졌다.

HSE 랩은 과거의 산재 사고뿐 아니라 최근, 미래 상황도 연구하고 있다. 영국의 ‘1인 건설업자’ 안전 문제가 대표적이다. 요즘 영국 건설현장에선 조그만 밴에 혼자 가스통을 싣고 다니는 1인 건설업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예전엔 없던 장면이다. 

사고 시 큰 피해가 우려되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위험에 둔감했다. HSE가 고민 끝에 찾아낸 대안은 1인 건설업자들에게 시각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었다. 야외 실험실에서 가스통을 실은 자동차가 폭발하는 영상을 1인 건설업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공유했다. 향후 수소자동차가 일으킬 수 있는 화재사고 또한 HSE의 연구 대상이다.

이렇게 많은 업무를 수행하고 막강한 권한을 가진 HSE의 자부심은 엄청나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김인수 변호사는 “HSE는 (산재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영어로 파워 트루 엔진(power true engine)이라고 얘기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전했다. 조너선 그림스 산재 전문 변호사도 “영국에서 산재 사망사고 발생 시 경찰과 HSE가 공동으로 조사하는데, 여기서 (힘이 실리는) 전문가는 HSE”라며 “기업살인법이 보건안전법(Health and Safety at Work etc Act) 대비 적용 사례가 적은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말했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누구든 산재에 대해 이곳 관계자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 “연구를 통해 개별 기업 교육을 수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각 산업군에 노하우를 알려주고, 세미나 등에서 자체 연구 내용을 알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에 매일 실험을 추가하고 있다”며 HSE의 노력을 강조했다.

노력의 성과는 수치로 드러난다. 2016년 영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노동자 10만 명당 0.53명(HSE 데이터 기준). 유럽 최저 수준이다. 같은 기간 한국은 18배가량인 9.6명(통계청 기준)을 기록했다. 김용균씨가 숨진 지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한국에선 또 500여 명이 작업장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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