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지 취재] 누구도 말하지 않은 ‘기업살인법’의 불편한 진실
  • 공성윤·오종탁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2 10:00
  • 호수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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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법’ 대체재 될 수 없는 이유…보건안전법 있고 인프라 탄탄했던 英과 사정 달라

1월16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을 일각에선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 부른다. 고(故) 김용균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산업재해와 ‘위험의 외주화’ 등을 막기에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보완책 내지 대안으로 꼽히는 것은 영국이 2008년 도입한 기업살인법이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 기업살인법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설명하는 이는 드물다. 기업살인법은 정말 김용균법의 대체재일지, 위험의 외주화를 해결할 열쇠일지, 영국이 아닌 한국에서도 통할지 따져보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이에 시사저널은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산하 SNU팩트체크센터의 지원으로 2019년 12월2~6일 영국을 찾아 이에 대한 답을 구했다. 국내 언론사 중 최초로 영국 정부의 산업 안전 전문기관인 보건안전청(HSE)을 방문하고 법학자, 변호사, 전직 검사 등도 두루 접촉했다. 어렵사리 찾아간 기업살인법 피징계 업체에선 인터뷰를 거부당하기도 하며 기업살인법의 '진짜 모습'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Those responsible for creating the risk must take ownership of it.(위험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든 그 위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2019년 12월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시내의 한 건설현장 ⓒ 시사저널 공성윤
2019년 12월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시내의 한 건설현장 ⓒ 시사저널 오종탁

시사저널은 2019년 12월2일부터 일주일간 산업 안전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영국에서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을 막을 근본 대책과 관련해 취재했다. 위 문장은 12월5일 영국 보건안전청(HSE) 산하 보건안전연구소(HSE Laboratory)를 방문했을 때 처음 접했다.  

니콜라스 릭비 HSE 수석감독관은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통해 해당 문장을 보여주며 "이것이 모든 영국 산업안전법의 대원칙이다. 산업재해에 시달리는 수많은 나라가 이 간단한 원칙을 깨닫지 못해 영국에 배우러 찾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원칙을 토대로 영국은 1974년 보건안전법(Health and Safety at Work etc Act·이하 HSWA)을 만들어 시행했다. 한국 언론에선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수많은 한국 언론은 기업살인법이 시행된 2008년 이후 영국의 산재 사망률이 대폭 줄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우리도 기업살인법을 도입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1월16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산업안전보건법, 이른바 '김용균법'이 위험의 외주화 등을 막기에 역부족이란 목소리가 커지면서 기업살인법 같은 제도적 대안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강력한 법안을 도입하면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거란 막연한 기대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기업살인법 도입으로 달라진 것은 노동자 사망과 관련해 사람뿐 아니라 기업도 기소할 수 있다는 정도다. 산재 사망사고가 일어났을 때 경찰이 기업살인법을 적용하는 비율은 5% 미만에 불과하다"고 릭비 수석감독관은 말했다.

2019년 12월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캠든타운의 한 건설현장. 건설사가 자체 안전규약을 준수한다는 걸 알리는 CCS 안내문이 붙어 있다(아래 사진). ⓒ 시사저널 오종탁
2019년 12월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캠든타운의 한 건설현장. 건설사가 자체 안전규약을 준수한다는 걸 알리는 CCS 안내문이 붙어 있다(아래 사진). ⓒ 시사저널 공성윤

"기업살인법 적용 비율 5% 미만" 

영국계 건설업 전문 로펌 핀센트 메이슨에 따르면 2008년 이후 10년 동안 기업살인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기업은 26곳이다. 그사이 산재 사망자(1382명)와 비교하면 2%도 채 안 된다. 영국검찰청(CPS) 소속으로 기업살인법을 일선에서 직접 다뤘던 스티븐 오도허티 전 검사는 런던에서 시사저널과 만나 "기업 처벌 측면에서 HSWA가 기업살인법보다 기준이 덜 까다로워 적용 사례가 훨씬 많다"며 영국에서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산재 관련법은 HSWA라고 설명했다. 

릭비 수석감독관도 "영국이 산업 안전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업살인법보다는) HSWA 덕분"이라며 "이 법안 시행 이후 (안전사고에 대한) 기업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고 강조했다. 기업 전담 변호사 출신인 빅토리아 로퍼 노섬브리아대학교 로스쿨 부교수의 말 역시 비슷했다. 그는 "HSWA가 규정한 기업의 의무가 기업살인법 도입으로 바뀐 건 없었기 때문에 (기업살인법에 대한) 업계 반발도 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HSWA 도입 전까지 정부가 안전 보호 책임을 갖고 산업별로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면, 도입 이후엔 각 산업 주체에게 보호 책임을 넘기고 안전 목표를 달성하게 했다"고 말했다. 규제보다 자율성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각 업계에 '모든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등 포괄적 목표만 제시한다. 개별 기업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목표를 이뤄내면 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기업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목표 달성 방법을 연구하는 분위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런던 시내 건설현장 6곳을 직접 둘러봤다. 모든 곳에 '건설사 배려계획(CCS)'이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는 건설사들이 HSWA를 기반으로 결성한 안전 관리 협회다. 소속된 1000여 개 업체는 CCS가 만든 안전 규약을 따라야 한다. 안전모 상시 착용도 그중 하나다. 

런던 캠든타운의 한 오피스 건설현장에서 마주친 노동자 톰(30)은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우면서도 안전모를 벗지 않았다. 그는 "공사 유형에 상관없이 현장으로 지정된 구역 안에선 무조건 안전모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또 CCS는 자체 감독관을 파견해 안전 규약 이행상황을 점검한다. 톰은 "감독관에게 경고를 4번 받으면 당장 해고된다"고 했다. 

근처의 주택 건설현장 노동자 아데웨일(26)은 현장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공사 시작 시간인 오전 9시 전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주변 행인들이 안전한지 살피고 통행에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간판을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역시 CCS가 정한 자체 규약이다. 애초에 규약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정부 탓을 할 수가 없다. 

한국 고용노동부는 지난해부터 공사 용도로 사다리를 쓰는 걸 금지했다. 사다리는 오르내릴 때만 사용하라고 규칙을 바꾼 것이다. 곧 "현장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란 질타가 쏟아졌고, 정부는 예외 사항을 마련하며 한발 뺐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안전 문제에 있어 정부 주도의 톱다운(Top-down) 방식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근본적인 산재 예방책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19년 12월3일(현지시간) 영국 거중기 임대업체 볼드윈스 크레인의 런던 지사를 찾아 인터뷰를 시도했다. ⓒ 시사저널 오종탁
2019년 12월3일(현지시간) 영국 거중기 임대업체 볼드윈스 크레인의 런던 지사를 찾아 인터뷰를 시도했다. ⓒ 시사저널 오종탁

안전 선진국 핵심은 ‘자율성’과 ‘강력 제재’
 
물론 그렇다고 영국 산재 사망자 수가 '0'인 것은 아니다. 2018~19년 영국 내 일터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147명으로 조사됐다. 산재 사망사고 발생 시 영국 사법당국은 ‘징벌적 벌금 부과’란 칼을 뽑아든다. 

한국 언론 다수는 "영국은 기업살인법을 통해 상한 없는 벌금을 물린다"고 보도해 왔다. 사실 '상한 없는 벌금' 조항은 이미 HSWA에도 포함돼 있다. 40년 넘게 법적 억제력이 이어져 온 셈이다. 벌금만이 아니다. HSWA에 따라 HSE 안전감독관은 본인의 수고비를 기업에 요구할 수 있다. 사업장 조사와 보고서 작성에 걸린 시간에 대해 '시간제 보수'(time charge)를 매기는 것이다. 그 액수는 시간당 125파운드(약 18만원)에 이른다. 

아울러 영국 안전감독관에게는 기소권과 작업중지 명령권이 있다.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일단 기소권은 '기소독점주의'에 따라 검사에게만 부여된다. 작업중지 명령권의 경우 고용부 근로감독관도 갖고 있다. 하지만 김용균법 시행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그 기준을 놓고 합의하지 못했다. 

자율성 보장과 강력한 제재. 이 당근과 채찍은 HSWA를 지탱하는 두 축이다. 나아가 '위험을 만드는 쪽이 누구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대원칙의 실행 방안이다. 기업살인법은 그다음 고려 사항이다. 

 

“기업살인법만 보고 영국 따라 해선 안 돼” 

영국 산재 전문 변호사 조너선 그림스는 "기업살인법은 '기업이 근로자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라며 "이것만 바라보고 영국의 산업 안전 체계를 따라 하려는 태도는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기업살인법의 한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정작 대기업은 법망에서 비켜서 있다는 점이다. 시사저널은 기업살인법 유죄 선고를 받은 기업 26곳의 규모를 '영국 정부 기업회계지침' 기준으로 나눠봤다. 선고 직전 해에 중견기업 이상으로 분류된 곳은 항공부품업체 CAV에어로스페이스 한 곳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중소기업으로 나타났다. 오도허티 전 검사는 "기업 규모가 클수록 조직이 복잡다단해 특정 사고 책임을 회사 전체에 묻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철퇴를 맞고도 끄떡없는 기업도 있다. 거중기 임대업체 볼드윈스 크레인은 2015년 11월 벌금 90만 파운드(약 14억원)를 선고받았다. 기업살인법 처벌 사례 중 두 번째로 큰 액수다. 그래도 잘나간다. 이 기업의 2018년 매출은 2015년보다 112만 파운드(약 17억원) 올랐다.

시사저널은 영국 방문 전 볼드윈스 크레인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 업체 홍보 담당자 데비 머레이는 "책임자에게 전하겠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결국 약속을 잡지 못하고 12월3일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볼드윈스 크레인 런던 지사를 찾았다. 현관 앞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격양된 어조로 "머레이는 자리에 없다"며 취재진을 돌려세웠다. 

여러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은 어떤 조처를 했을까. 정부는 기업살인법을 개선하는 대신 HSWA를 더 강화하기로 했다. 2016년 2월 시행에 들어간 '선고 가이드라인(Sentencing Guidelines)'이 그것이다. 이는 HSWA의 형벌을 구체화한 지침으로, 기업살인법 적용 없이도 충분한 벌금을 매길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선 산재 사고를 줄이기 위해 위험의 외주화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2012년 전후로 언론에 등장한 이 표현은 비정규직 문제와 맞물려 산재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곤 했다. 일부 유해 업무의 외주화를 금지한 김용균법 취지도 이와 같다. 김용균씨가 숨진 태안발전소의 원청 한국서부발전을 포함해 국내 5대 발전사에서 최근 5년간 사망한 노동자는 모두 하청업체 소속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영국은 산재의 책임을 물을 때 원·하청 구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영국 정부는 안전보건관리 지도서에서 '하도급 자체가 안전 문제의 원인은 아니다'고 밝혔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원청과 마지막 하청 사이에 몇 개의 기업이 끼어 있더라도 모든 주체가 각각 다 책임을 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산재 책임에 원·하청 구분 없어

2015년 4월 영국 에식스에서 한 노동자가 창고 지붕을 수리하던 중 추락사한 적이 있다. 그는 창고 소유 기업 오즈딜 인베스트먼트(Ozdil Investments)의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수사 결과 하청업체 코서글루 메탈워크(Koseoglu Metal Work)는 건물 수리 경험이 전혀 없는 철강업체로 드러났다. 두 업체는 HSWA와 기업살인법 위반으로 총 106만 파운드(약 16억원)의 벌금을 맞았다. 원청 오즈딜에는 66만 파운드, 하청 코서글루엔 40만 파운드의 벌금이 각각 책정됐다. 원·하청 관계없이 ‘위험을 만든 주체’로서 처벌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 경제를 이끄는 대기업들은 기업살인법 등 산재 사고 처벌에 위축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철저한 산업 안전 관리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릭비 수석감독관은 전했다. 그는 "안전을 잘 관리하면 평판이 좋아지고 보험료가 낮아져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지만, 안전을 관리하지 못하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손해"라고 덧붙였다. 

이어 릭비 수석감독관은 한국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뼈아픈 충고를 남겼다. 그는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기업이 산업 안전 책임을 회피하거나, 기업 입김이 너무 세서 정부 규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꽤 있다"고 지적했다.

릭비 수석감독관은 "기업 스스로가 안전에 투자하는 게 수익성 측면에서 오히려 효율적이란 걸 깨달아야 한다"면서도 "그렇다고 앞서 설명했듯 정부가 기업들에만 책임지라고 해도 안 된다"고 말했다. 산재 사고 예방에는 특출난 묘수도, 극약처방도 없다. 차근차근 합리적인 법체계와 ‘책임 분담’ 모델을 만들고 점진적 변화와 보완을 이뤄가는 게 필요하다. 시사저널이 영국 취재 결과 알아낸 불편하지만 명확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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